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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파도타기

조선 15대 왕 - 광해군[이혼(李琿)] 왕이 된 남자 / 광해, 왕이 된 남자

by 섹시맘1004 2019.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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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왕 - 광해군[이혼(李琿)] 왕이 된 남자 / 광해, 왕이 된 남자


tvN 왕이된남자가 어제 방영이 되었다.


광해군, 광해왕, 광해로 불리우는 광해..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일찍이 영화화 되었던 인물, 광해

이제 드라마에서 "왕이 된 남자"로 새롭게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 "왕이 된 남자"에서 광해의 모습은 어떻게 비춰질지...

역사를 기반으로 한 픽션 드라마이니 드라마를 보면서 역사속의 인물 광해를 알아보는것도 좋을것으로 보입니다.



tvN 왕이된남자





광해, 왕이 된 남자



뛰어난 외교정책, 조선 중기 실리외교를 택한 왕이다.

광해군, 광해왕, 광해로 불리우며 조선 제15대 왕이다.


조선 15대 왕으로 1575년 선조 8년에 태어나서 1641년 인조 19년에 승하(사망) 했다.

광해왕의 재위기간은 1608년~1623년 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혼().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비()는 판윤 유자신()의 딸이다.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 이진()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인륜을 저버리고 난폭하다고 하여 보류되고1592년(선조 25) 4월, 20만 일본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임진왜란이 시작된것이었다. 


"7년 전쟁" 이라고 불리는 임진왜란은 전투 초반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의주로 몽진하는 등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우리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 소식과 전국에서 일어난 자발적인 의병들의 활동과 명나라 군사의 참전등으로 인하여 전세가 우리측에 유리하게 되어 조선땅에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더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들이 있으나 그중에 하나더 추가 한다면 광해군의 분조()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분조()란 말 그대로 ‘조정을 나누다’ 또는 ‘조정의 분소’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와 평양 등지에 상주하였던 선조()가 있던 원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주도하던 조정을 말한다. 


선조에게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책봉해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발발 몇 해 전 정철() 등이 건저의(,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를 제기, 정치적 파란이 있기도 하였다.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 조선은 다급했다. 결국 부리나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분조의 책임자 광해군은 전쟁 기간 중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를 위한 국사권섭()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 모집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어 있는 곳)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 체계를 위해 군무사()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다. 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해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 하여 거절당하였다.


분조의 활동 등으로 임진왜란 때 상당한 공로를 세운 광해군이었기에, 그는 아마도 내심 세자의 자리가 굳건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하여, 선조가 55세가 되는 해인 1606년(선조 39)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였다. 


더구나 평소 광해군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조였기에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유영경 같은 이는 세종 때 고사를 원용해 갓 태어난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올리기도 할 정도였다.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조는 간혹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루는 병중에 있던 선조가 족자에 대나무를 그렸다. 하나는 바위 위에 왕대()가 늙어 바람과 서리를 겪어 꺾이고 마르는 모습이요, 또 하나는 악죽()이 왕대 곁에서부터 뻗어나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데, 긴마디가 한 치를 넘어, 너럭바위를 넓게 점거한 채 꾸불꾸불 서리서리 엉킨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 돌 위에 왕죽의 원줄기로부터 뽑혀 나와 어린 가지와 연한 잎이 비록 아직 장성하지는 못했으나, 싱싱하고 운치 있는 바른 죽순이 하늘을 찌르고 달을 희롱할 기상이 있었다.


며칠 뒤 선조 이항복이덕형유영경이홍로 등을 인견하고는 내시에게 족자를 가져오게 하여 보여주며 이르기를, “내가 병중에 우연히 한 대나무를 그렸는데 솜씨가 어떠한가?”라며 물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기함을 칭송할 뿐이었으나 유영경이나 이홍로 등은 선조의 의중을 간파하였으니, 이홍로 같은 인물은, “전하의 오늘의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죽은 선조를, 악죽은 광해군을,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한 것인데, 이홍로나 유영경은 국왕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었다. 


심지어 선조는 승하 직전 세자 광해군이 문안하는 것을 아뢰면,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감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광해군의 손을 들어 주어 큰 변화없이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결국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파란의 예고였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광해군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 해 제15대 왕으로 책봉되었다. 


즉위한 후,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하였다.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 )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시켰다.


이듬 해에는 김직재()의 무옥()으로 100여 인의 소북파를 처단했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허위 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또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 해 살해하였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가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면서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허준을 지원해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 속에서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동안 조선의 사대국가로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으로 재정이나 군사력부분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사방에서 지방 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특히 건주위 여진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동향은 종전과는 달랐다. 


즉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던 대외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국가의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 제조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멸망하는 용의 꼬리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성장하는 뱀의 머리를 잡을 것인가?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광해군은 철저하게 실리를 선택하였다.


마침 1618년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앞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서둘러서 파병해야만 하였다. 


당시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명나라의 요청에 신속하게 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시세를 관망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파병 군사의 대장이었던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려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시세를 보아 판단하라고 하였다. 전장에 도착한 뒤 치러진 심하 전투에서 대패하자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오랑캐 진영과 협상을 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일행은 이후 광해군과 개인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후금의 동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의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말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도처에 산재하였다. 왕위에 오른 직후 선조 말년에 자신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인 유영경과 그 일당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리고자 연릉부원군 이호민 오억령등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중국과의 사대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이나 왕비의 승하나 책봉 등이 있을 경우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이를 통보하고 그에 합당한 조서 등을 받음으로써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에게 장자가 되는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이호민 등이 이런 저런 이유를 말했으나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급기야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이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결국 임해군에게 미친 행세를 하도록 해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순탄치 않은 왕좌였다.


임해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여 광해군의 왕위가 바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는 배다른 형제로 적자인 영창대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항상 광해군의 왕권에 부담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에게 엉뚱한 방향에서 호기가 다가왔다. 1613년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박응서 등이 모사를 꾸미기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조령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흔히 “칠서지옥()”이라 한다. 


체포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된 뒤 서궁에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이전()의 추대 사건에 연루된 신경희()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 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으로 빚어진 일이었다.


전란으로 인한 전화()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하였다.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 ), 1621년에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해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후금의 강성에 대한 대비책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 만포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해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부차() 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使: )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노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 때 나왔다. 외래 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이귀()·김자점() 등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 


또한 인재 기용에도 당파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축출됨으로써 통상의 다른 왕들이 갖는 묘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묘호()이다. 


묘호는 국상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에 안치할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당사자 사후에 붙여지는 이름이니 당사자들은 알 리가 없는 이름이다. 


묘호의 제정은 또한 제정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권력의 향배가 중요한 변수이다.


흔히 묘호에는 조()나 종()이 붙게 마련이다. 태조니 태종이니 세종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재위했음에도 그는 왕자, 그것도 적장자가 아닌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붙여지는 군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불려지고 있다. 


혹자는 그가 후궁 소생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후대이지만 장희빈 소생인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는 종과 조가 붙여지지 않았는가. 


단종은 노산군으로 불리며 묘호조차 갖지 못하다가 사후 250여년이 지난 숙종대 묘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후 어느 시기에도 그의 묘호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된 이유는 패륜적 행위와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지배층인 사림들은 명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륜을 중시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국관계에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취한 모습은 이것과 사뭇 달랐다. 이렇게 보면 광해군이 묘호를 갖지 못한 것은 시대의 이상과 다른 방향을 추구한 결과가 아닐까? 


이상적으로 본다면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준 명나라를 돕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상적으로 본다면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들을 포용하며 정치를 하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는 것 아닐까? 이상과 현실의 조화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패륜적인 혼군()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묘호는 광해지군묘()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다.


광해군의 가계도

 부모

 선조

공빈 김씨 

 

 

 

 

 

 

 

 부인(10명)

 문성군부인

 유씨

숙의

윤씨 

숙의

허씨 

숙의

홍씨 

숙의

권씨 

숙의

원씨 

소용

임씨 

소용

정씨 

숙원

신씨 

조씨 

 자녀

 (1남1녀)

 질

(폐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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