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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독립운동가 유관순

by 섹시맘1004 202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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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독립운동가 유관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유관순

  • 출생 : 1902년 12월 16일
  • 출생지 :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
  •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05)
  • 사망 : 1920년 9월 28일[2] (향년 17세)
  • 사망 장소 :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본관 : 고흥 류씨
  • 부모 :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 형제자매 : 언니 유계출, 오빠 유우석, 남동생 유인석, 유관석
  • 신체 : 151.5cm
  • 학력 :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 재학 중 순국)
  •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서훈 : 건국공로훈장 단장[12] 추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19년)

유관순(柳寬順)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유관순은 1902년에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일본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며 활동했습니다.

유관순은 1919년 3.1 독립운동(3.1절) 당시에 17세로 천안에서 청년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일본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유관순은 감옥에서 여러 차례의 항의와 저항을 통해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일본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관순은 당시의 히로시마현 아야문 감옥에서 수용되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에게 가혹한 방법으로 고문을 받은 후 1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유관순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투쟁자로서, 한국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희생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는 여러 기념관과 도로 등이 설립되어 있습니다.

본관은 고흥 류씨입니다. 두음법칙과 관련하여 성명 표기에 대해 과거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2007년 4월에 일부 성씨의 사람들이 호적상 이름을 변경해 달라며 낸 신청을 받아들이는 지방법원의 결정이 있었고, 표기 문제에 대해 여러 국가기관에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논의의 결과 2007년 8월에 대법원의 호적예규가 개정되었고 이에 따라 류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본인 의사에 따라 한글로 '류'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7년 10월 헌재는 개정된 호적예규가 문제시될 것이 없다고 확인했습니다.

1902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7일 ~ 1920년 9월 28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 소제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이복언니가 있음) 본관은 고흥(高興)입니다. 1905년 집을 근처 탑원리로 이사했다가 1907년 무렵 다시 가족을 따라 지령리(현 용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공주 영명 여학교에서 2년간 교육을 받았습니다.

국가보훈처(국가보훈부)에 등록된 비영리 사단법인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처음에 "유" 표기를 쓰고 있었고 2001년에 "류" 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두음 법칙에 따라 교과서나 공식 행사에서 오랜 기간 '유관순'으로 표기해 왔고 '류'로 고쳐서 생긴 사회적 혼선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2014년부터 유관순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이뤄진 모진 고문으로 인해 순국했습니다.

191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인 사애리시 부인(사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했습니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일제의 교도소에서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했습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습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해방 후 박인덕(나가카와 인도쿠(永河仁德))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습니다. 이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습니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 토론회 및 외부 인사 초청 시국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 주1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습니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이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중 신특실 · 유점선 · 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습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 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 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습니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이었습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갇혔고, 이곳에서 공주영명고등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선고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함께 재판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유관순은 이신애(李信愛), 어윤희(魚允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하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교도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형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이화학당은 교도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시신은 이화학당 경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 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샘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습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생애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충청남도 공주 영명 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자연히 가족과 헤어져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기어이 전원이 참가했습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일제는 전국 모든 학교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고,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천안으로 귀향해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모두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관순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받았는데,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일본인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습니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 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 형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서훈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 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상훈법상 훈장은 같은 공적으로 중복으로 수여할 수 없으나,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라는 것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별도의 공적으로 인정하여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하기로 하였습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습니다. 1991년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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