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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교육/여러가지

✅잊지말고 ✅기억하기

by 섹시맘1004 2019.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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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 잊지말고 기억하기에 어떤 사람들을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단순히 본인이 싫어서 본인이 그사람들이 미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래에 나열했던 많은 못된 놈, 년들도 있지만 우리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기억해야 할 존경에 넘어 공경해야할 이땅의 많은 분들도 당연히 잊지말고 기억해야 하기에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 나라사랑의 정신을 본 받아야 하기에 그분들의 성함과 그분들의  행적을 추척해봅니다. 왜, 저런 못된 놈들, 나쁜 년들과 같이 이름을 나열하자 하느냐 하시면 우린 양쪽 다 잊지말고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정의를 혼자 내리겠습니다. 아래의 자료들은 나무위키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KBS 탐사보도부 시사기획 창 그리고 여러 곳에서 발취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비가 오네요. 모두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강필선 : 1918년 ~ 1990년 9월 22일(오래 살았네...진짜..나쁜놈은 지독스럽게 오래살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며 정치인이었다. 1918년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현 아산시 온양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국 중앙경찰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 내무성이 운영하는 경찰강습소 본과를 나왔다.


이후 만주국에서 모교인 중앙경찰학교의 조교수로 근무했다. 그리고 만주국 고등관 시험 행정과에도 합격했다.

8.15 광복 후에는 지린성 창바이현에서 한국인회의 회장을 맡아 잠시 만주에 머물다가 귀국했다. 고향인 아산군 온양읍에서 동방산업 사장, 온양극장, 온양정미소 사장을 지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영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민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제17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민당에서는 충청남도지부 위원장, 지도위원 등을 지냈다. 한편 반 유진산계에 속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민주통일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철 후보와 신민당 황명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에 복당하여 해당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정재원에게 밀렸다. 다시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철 후보와 신민당 정재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3년 해금되었다.

만주국 국무원 치안부 소속으로 일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해외 부문에 포함되었다.



계광순 : 1909년 2월 16일 ~ 1990년 3월 19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09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신의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가서 마쓰야마 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관료로 활동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 관료로서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등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기업체에서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조선인민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탈옥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강원도 춘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홍창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홍창섭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 신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당에 속하였다. 1965년 민중당 소속일 때 조재천 전국구 국회의원이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승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강원도 춘천시-춘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우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고영희 : 1849년 11월 2일 ~ 1916년 1월 25일, 경술국적정미칠적 중 하나. 친일파매국, 친일반민족행위자1849년 11월 2일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이며 본관은 제주, 호는 우정이다. 젊어서부터 개화사상을 접해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다. 또한 갑오개혁에도 참여하였다. 1910년 경술국적 때 일본에서 조선 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1867년 역과에 합격했다. 1876년 5월에 김기수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에 일본어 통역으로 수행해 일본을 시찰했다. 1880년 5월 원산항 개항 때 사무관으로 종사하고 같은 해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1882년 6월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이 인천에 도착해 있을 때 차비 역관으로 영접과 통역을 담당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때는 조계정 사무를 담당했다. 1884년 2월 양지 현감에 임명 되었다가 같은 날 다시 간성 군수에 임명되었고 9월 지평 현감으로 옮겼다. 같은 해 10월 통리 교섭 사무 아문 참의에 임명되었고 11월 삭녕 군수로 옮겼다. 1885년 4월 고양 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1월 연천 현감으로 옮겼으나 곧바로 사직했다. 1886년 4월 기기국 방판으로 관직에 복귀해 종목국 사무를 겸임했다. 1894년 6월 내무부 참의에 임명되어 9월 의화군 이강이 보빙대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 1등 수원으로 수행했다.

1895년 4월 학부협판에 임명되어 5월부터 8월까지 일본 특명 전권 공사를 지냈다. 1896년 1월부터 3월까지 농상공부 협판을 지내면서 2월에는 농상공부 대신 사무를 서리했다. 같은 해 3월에 외부 협판에 임명된 후 9월부터 외부대신 사무를 서리했다. 같은 해 7월 독립 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897년 9월에는 다시 학부 협판에 임명된 후 1898년 7월부터 10월까지 학부대신 사무를 서리하면서 양지 아문 부총재관을 겸임했다. 1898년 10월 탁지부 협판에 임명된 후 탁지부 대신 사무도 서리했다. 같은 달에 열린 관민 공동회에 정부 측 참석자로 참여한 일로 그해 11월 징계를 받았으나 곧바로 탁지부 협판으로 복귀했다. 1903년 2월부터 11월까지 다시 한번 일본 특명 전권 공사를 지냈고 12월부터 다시 탁지부 협판에 임명되었다가 1904년 5월 학부 협판으로 옮겼다. 1905년 5월 법부 협판에 임명되었다가 7월 평리원 재판장과 중추원 참의를 거쳐 10월부터 황해도 관찰사 겸 황해도 재판소 판사를 지냈고 1906년 6월 제실 회계 심사국장에 임명되었다.

1907년 2월에 서울에 장훈 학교를 설립하고 4월에 교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5월에 성립된 이완용 내각에서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어 1908년 6월까지 재임했다. 재임 중이던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과 관련해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면서 어전 회의에서 이완용 등과 함께 양위를 주장했다. 고종 강제 퇴위에 앞장서는 한편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동조해 이완용 - 총리대신, 송병준 - 농상공부 대신, 임선준 - 내부 대신, 이병무 - 군부 대신, 조중응 - 법부 대신, 이재곤 - 학부대신과 함께 정미 7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조선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같은 달 고종의 강제 양위와 정미 조약 체결에서 보여준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3월에 탁지부 대신으로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시정 개선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일시 대부금에 관한 계약에 조인했다.

1908년 6월 법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8월 조선에 대한 자선 구제와 복리 증진을 명분으로 진출한 동양 협회의 취지에 찬성해 100원을 기부했다. 같은 해 10월에 일본 적십자사에서 특별 사원장을 받았고 11월에는 대한 산림 협회 명예 회원으로 참여했다. 대한 산림협회는 일제가 전국의 산림 측량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단체로 일본인 측량 기사를 초빙해 산림 사업을 주관했다. 1909년 6월 일본 정부가 수여 한 일본 황태자 도한 기념장 패용을 허가받았고 10월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임시로 법부 대신의 사무를 서리했다. 같은 해 11월 도쿄에서 열린 이토 장례식에 맞춰 대한 제국 정부 - 내각 및 한성 부민회 주최로 장충단에서 관민 추도회를 열 때 발의에 참여하고 추모했다. 같은 달 말에는 일진회가 성명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자 이완용의 지시로 오사카 조폐국 시찰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해 수상 가쓰라 타로를 만나 합방 안 5개 조항을 제출했으나 거절당했다. 

1910년 3월 토지 조사국 관제 발표와 함께 탁지부 대신으로서 합병될 때까지 토지 조사국 총재를 겸임했다. 같은 해 8월 22일 탁지부 대신으로서 합병 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 회의에 참석해 가결함으로써 황족 대표로 참석한 이재면과 더불어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조중응, 궁내부 대신 민병석, 시종 원경 윤덕영, 시종 무관장 겸 친위부 장관 이병무 등과 함께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1일 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6년 1월 사망할 때까지 5년여 동안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에는 조선 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조선 귀족의 실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명농회 조직에 참여해 취지서와 규칙을 발간했다. 1911년 1월에는 은사 공채 10만 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같은 해 8월 29일에는 합병 1주년을 기념하는 매일신보 특집호에 공축 병합 일주년 기념이라는 기념 축사를 게재했다. 1912년 8월에는 경술국치 기념장을 받았고 12월에는 정4위에 서위되었다. 같은 해 11월 조선 귀족 대표로 일본 교토 모마야마 백일제에 참석해 참배했고 1913년 7월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 천황 1주기 추도식에 조선 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1915년 1월에는 조선 총독부 주도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 경성 협찬 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5월에는 특별 유공 회원으로 50원을 기부했다. 같은 해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고 그 후 1916년 1월 25일 사망했다. 사망 당일에 종3위로 추서되었다. 같은 해 2월에 치러진 장례식에 일본 정부가 보낸 칙사가 참석했다. 작위는 1916년 3월에 그의 작위는 장남 고희경이 세습했다.



고원훈 : 1881년 ~ 1950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며 기업인이다.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메이지 대학에서 유학하여 1910년 7월 동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11년 8월 조선총독부의 경부(警部, 경찰의 계급)로 채용되었고, 1913년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로 옮겨 교수로 재직하다가 1920년 이 학교 교장이 되었다.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는 1921년 전문학교 인가를 받고 보성전문학교로 승격했고, 그는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한편, 1920년 7월 조선체육회의 초대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1921년 같은 회의 회장이 되었다.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도 참여관으로 관료의 길을 걸었다. 전라남도(1924년 12월), 경상북도(1926년), 평안남도(1929년), 경기도, 평안북도(1930년 4월)에서 참여관을 역임하고 1932년 9월에는 전라북도 도지사가 되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국강연회에 참가하였다. 즉, 1937년 9월 경상북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내선일체와 황도(皇道) 실천을 주장하는 강연을 하였고, 1938년 7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열린 조선총독부 후원의 시국대책강연회에서 ‘일본의 수호신이 돼라. ’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또한, 1940년 10월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동맹에서는 이사와 연성부(鍊成部) 연성위원 등의 직책을 맡았으며, 1941년 흥아보국단을 조직하여 상임위원이 되었는데, 이 단체의 결성식 때 좌장(座長)으로 선출되어 ‘출전 장병의 노고를 감사한다.’라는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년)에도 가담하고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고, 1941년 10월 평양과 춘천에서 당시 결성 예정에 있던 조선임전보국단의 사명을 해설하는 강연을 하였고, 이어 임전보국단을 결성하여 부단장이 되었다. 이즈음에 이른바 일본식 성명 강요를 권유하는 강연을 행하면서 자신도 성을 고원(高元), 이름을 훈(勳)으로 고쳤다.

고원훈은 동광제사(東光製絲) 사장으로서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이기도 했다. 1944년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사용할 비행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김연수 등과 더불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이 되었다. 이 회사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될 비행기를 제작하는 기업이었다. 1945년 2월 대화동맹을 만들어 심의원이 되었고, 같은 해 6월 대의당을 조직하여 위원직을 맡았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1950년 11월경 강계 근처 산중에서 강행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유정 : 지난 6월 1일 경찰이 제주 여행 중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고유정을 충북 청주에서 긴급체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w6Bw7qT9Wg&feature=youtu.be

고유정, 체포 당시 "왜요?"에 대한 전문가들 "'시신 찾았느냐'라고 물어본 것"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125046622559112&mediaCodeNo=257&OutLnkChk=Y

‘고유정 체포 영상’ 당시 서장이 유출…경찰청, 진상조사 착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51486

제주 전 남편 살해 30대女 또다른 의혹…의붓아들 3개월전 질식사

https://www.nocutnews.co.kr/news/5160782

제주 전남편 살해 30대 의붓아들, 청주 온지 수일 만에 숨져

http://news1.kr/articles/?3638107

"아이 문제로 갈등"…제주 전 남편 살해는 계획범행?

https://www.nocutnews.co.kr/news/5160830

고유정, 의붓아들 장례식 참석 안해…경찰 "모든 가능성 수사"

https://www.yna.co.kr/view/AKR20190613083300056?input=1179m

"고유정이 내 아들 죽였다”…현 남편 검찰에 고소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613_0000680551&cID=10899&pID=10800

현 남편 "고유정, 각방 쓰자더니…아들, 피 흘린 채 숨져"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33498

고유정 의붓아들 숨진 현장 혈흔…경찰 "타살증거 보긴 어려워"

https://www.yna.co.kr/view/AKR20190614155100056?input=1179m

고유정 의붓아들 의문사 관련, 국과수 “심폐소생술 흔적 없다”vs 재혼 남편 “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90617513951

‘고유정 의붓아들’ 국과수 부검 기사 왜 논란인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618

'의붓아들 돌연사' 고유정 9시간 2차 대면조사…"묵비권 없이 진술"(종합)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704_0000701786

경찰, '의붓아들 돌연사' 고유정 추가 조사…현 남편 변호인 질의 추궁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710_0000707250

'의붓아들 돌연사' 고유정-현 남편 대질조사서 '상반된 진술'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719_0000716652

“고유정, 아들도 죽였다” vs. “억울하다”…의붓아들 죽음, 10시간 ‘평행선

https://news.joins.com/article/23531436

[단독] 현남편 “고유정 얼굴 못보게 칸막이로 막아…이게 대질조사인가”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520268

[단독-고유정] '숨진직후' 촬영된 사진 6장..단순 질식사?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18892_24634.html

[단독-고유정] "순간적 강한 힘으로 누른 흔적"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18894_24634.html

[단독-고유정] 삭제된 '사건직후' 현장사진들..누가 왜?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18895_24634.html

고유정 현 남편, 아들 사망사건 피의자 전환… "경찰이 아내 돕는 느낌" 주장

http://www.segye.com/newsView/20190724515855

고유정 의붓아들 사망 캘수록 의문…경찰이 현남편 조사하는 이유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9072614164060900

‘그것이알고싶다’ 고유정 현 남편 “처음엔 아내 믿었지만‥방송 이후 충격”

http://www.mbn.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3899005

[영상+] 고유정 의붓아들도 살해했나-그것이알고싶다

http://www.4th.kr/news/articleView.html?idxno=14772

고유정 현 남편 "아들 과실치사 혐의 억울" 국민청원

https://www.yna.co.kr/view/AKR20190729057500064

고유정 사건, 경찰 국과수 결과도 배제한 정황 드러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968051

[고유정 사건] 말끝마다 "다 죽여 버린다"…섬뜩한 '문자 폭탄'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37183_24634.html

【김원의 스피커】 고유정 의붓아들 의문사 현 남편 독점 인터뷰 "눈을 떠보니..."

https://www.youtube.com/watch?v=slgU--BOU7k&feature=youtu.be

고유정 거짓말에 시민들 분노? "법정 최고형 바란다"·"의붓아들 사건 공정한 수사"

http://www.newswork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8875

충북경찰, '고유정 의붓아들 사망' 실마리 찾기 주력

https://www.nocutnews.co.kr/news/5203533

장대호·고유정 잇단 흉악범죄…경찰 "예방 전문화·공동체 치안"추진

http://news1.kr/articles/?3703858

“고유정 사건+인터넷 유해정보 영향 ‘장대호’ 만들어져”

http://www.segye.com/newsView/20190825507185?OutUrl=naver

고유정의 남동생이 "누나와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됐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살해 소식을 들었을 땐 믿지 않을 정도였다"라고 말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다만 주변인들의 발언에도 이런 부분이 있었으며, 살해당한 이에 대해 "살해 직전까지도 아이를 위해 노래 부르고, 양육비를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안타까웠다"라고 덧붙였다는 점에서 '그나마 중립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http://www.tfnews.co.kr/news/article.html?no=68556

피해자 동생은 청원 사유에 대해 "피의자 고유정이 재력가 집안이기 때문에 변호사를 써서 중간에 가석방이 될까봐 두려웠다"고 말했으며, 이 때문에 청와대 국민청원에 고유정 사형 청원을 올렸다고 말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399276&code=61121211&cp=du

2019년 6월 14일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주변인 증언, 고유정의 대학 시절 모습, 전문가가 분석한 범행 동기 등을 다루었다. 

https://www.asiae.co.kr/article/2019061513301158361

고유정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H 모 렌터카 업체의 바로 옆에 위치한 A 모 렌터카 업체가 고유정의 아버지가 이름만 바꿔서 운영한다는 유언비어에 휩싸여 피해를 받고 있다고 한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616_0000682196&cID=10899&pID=10800

2019년 7월 4일 법조계에 따르면 고유정이 법무법인 '율현'과 '금성'에서 변호인 5명을 선임했다고 한다. 형사소송법 관련 논문을 다수 작성한 판사 출신의 변호인과 대학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한 변호인이 포함됐다. 

http://news.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A201907040630

그러나 다음날인 7월 5일 변호인단 5인이 전원 사임계를 제출하였다. https://www.nocutnews.co.kr/news/5177996





고재호 : 高在鎬, 일본식 이름: 長澤在鎬, 1913년 8월 7일 ~ 1991년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법조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장흥, 호는 취봉(翠峯)이다. 고재청국회부의장이 그의 친동생이다.

1913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났다.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조선변호사시험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모두 합격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판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판사로 근무하였다. 대구지방법원장,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대구고등법원장을 거쳐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대법관 퇴임 후 1961년에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1965년 5월부터 1966년 5월까지, 1973년 5월부터 1974년 5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고황경 : 1909년 3월 6일 ~ 2000년 11월 2일. 교육자, 여성 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미군정청 부녀국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울여자대학교 총장

본관은 제주(濟州). 호는 바롬이다. 할아버지 고학윤은 미국인 선교사 통역이었고, 아버지 고명우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활동하였고,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에 능숙하였다. 외가는 황해도 송천에서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였고 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어머니 김세라는 정신여학교 1회 입학생으로 신교육을 받았다. 당고모가 김마리아, 언니가 고봉경(高鳳京)이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1909년 3월 6일 서울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황해도 은진의숙을 졸업한 후 1920년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同志社]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4년간 영어 공부에 매진하여 1928년에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8년 2월 근우회 교토[京都]지회 재정부 총무로 선출되었다. 다시 도시샤대학 법학부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해서 1931년 법학사가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여 1933년 경제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박사과정에 들어가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유학 시절 미시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들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원을 수료한 1935년 귀국해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해 법학, 경제학, 사회학, 영어 등을 가르치며 1944년까지 재임하였다.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도로 결성된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부인강좌 담당 강사로 위촉되었고, 같은 달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도로 조직된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4월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던 언니 고봉경과 사회복지사업기관인 경성자매원을 경성부 동교정에 설립하고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해 5월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해서 한국 여성으로 세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직후인 1937년 8월 전쟁 비용에 보태라고 금비녀 등을 헌납하자는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사를 맡았다. 1938년 6월 무렵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가 세계YWCA협의회에서 탈퇴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일본여자기독교청년회동맹 가입을 결의할 때 김활란, 유각경, 박마리아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9월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주최한 순회 강연에 전라남북도 지역에서 강연하였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설립에 참석하였고, 9월 임전대책협의회 회원으로 채권가두유격대 서대문대(西大門隊) 대원이 되어 1원짜리 ‘꼬마채권’을 팔았으며, 10월 최대 민간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2월에 부인대 지도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주최한 시국대책순회강연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1942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부인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회의에 참석하였고, 5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석하였으며, 6월 무렵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參事)에 임명되었고, 12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이 주최한 ‘징병제취지부인강연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사회복지사업을 더 확장하여 1942년 무렵 출옥해서 갈 데가 없는 여성을 정서적으로 교화시키고 한글을 가르치고 경제적 자립교육을 실시하는 여자감화원 가정료와 생후 1개월 미만의 기아를 수용하는 영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무의탁 소녀들을 데리고 철원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았다.

신문 · 잡지에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여성을 대상으로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주요 글을 보면 「명일의 가정: 자랑과 수치」(『半島の光』, 1941.5), 「전시의 가정: 가정은 국가의 뿌리」(『半島の光』, 1942.8), 「대전 일년간에 배운 것」(『半島の光』, 1943.1),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매일신보』, 1943.8.5), 「적전에 새해를 맞이하여」(『半島の光』, 1944.1), 「어려움을 기쁨으로 아는 생활」(『半島の光』 1944.9) 등이다.

해방 후 1945년 8월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가 조직될 때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10월 모교인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 11월 조선교육심사위원회 제5분과위원회(중등교육 담당) 위원이 되었다. 미 군정청에 부녀국 설치를 건의해 초대 부녀 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8월 미국의 교육실태를 참고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교육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47년 3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범아세아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컬럼비아대학교에서 약 1년간 머물면서 ‘인구문제’를 연구하였다. 그뒤 영국 UN 협회 초청으로 1950년 여름부터 1956년 초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가서 사회학을 연구하였다.

1957년 귀국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창설을 주도하여 1958년 4월 사회학과장을 맡았고 1960년 3월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여성사회학자를 양성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8년 3월 대한어머니회를 창립하고 수석최고위원(지금의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이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조직한 재단법인 정의학원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61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설립한 서울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11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3년 대한소녀단연합회(걸스카우트) 회장, 국제연합 한국협회 이사 겸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11월 국어순화운동전국연합회 회장, 198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1983년 순국열사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4년 4월 서울여자대학교 명예학장을 거쳐 1989년 3월 명예총장이 되었다. 명예학장으로 재임하던 2000년 11월 2일 사망하였다. 1963년 광복 18주년 문화포장(학술 부문),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의 훈포상, 1985년 5·16민족상(교육 부문)을 수상하였다.



권상로 : 1879(고종 16)∼1965. 법호는 퇴경, 종교인, 불교학자,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동국대 초대 박사학위 소지자이자 초대 총장, 이완용, 이종욱, 변설호, 이회광, 이동인과 함께 한국 불교 최대의 친일 흑역사, 이화여대김활란(심지어 김활란조차도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고 3.1운동 이후 친일파로 변절했는데, 이 인간은 을사늑약 이전 때부터 일본의 국권 피탈을 옹호하고 앉아있었다.) 이 있다면 동국대엔 권상로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879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8세 때인 1896년 출가해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서진(瑞眞)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었으며, 이회광(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릴 정도의 친일파)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906년 서울로 상경해 불교계 최초의 신식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 후 자퇴했다. 이후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서 설립한 봉명학 운영에 관여하였고, 김룡사 경흥학교(慶興學校)와 성의학교(聖義學校) 강사를 역임했다. 이회광의 주도로 불교계 대표들이 모여 창설된 종단인 원종(圓宗)에서 1909년 종무 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불교 승려에 대한 여러 가지 탄압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세력이 진입하면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정책을 해제하는 등 상대적으로 불교에 우호적인 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찬양하는 친일 문건을 다수 작성했고, 권상로는 자신이 편집자를 맡은 《조선불교월보》와 《불교》에 친일 논설을 수록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무렵부터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

1911년 문경 대승사(大乘寺)의 주지가 되었다. 1912년 조선불교월보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취임해 『조선불교월보』를 발행했으며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가 되었다. 『매일신보』에 1940년 9월 6일 자부터 3회에 걸쳐 「종교계의 임전체제」라는 글을 연재했으며, 같은 해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를 맡았다. 1942년 1월 잡지 『불교』에 「대동아전쟁(...)과 대승불교」라는 글을 발표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같은 잡지에 「전시의 전 책임을 맡으라」라는 글을 게재했다. 1943년 10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이 공포되자,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주최한 임시특별지원병에 관한 좌담회와 1944년 11월에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에서 주최한 종교봉사 국민총진격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안토 소오로(安東相老)

동국대의 김활란
해방 후인 1946년 4월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49년 5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으나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1952년 동국대학교 학장을 거쳐 1953년 2월 초대 총장직을 맡았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친일파를? 미친 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활란과 비교해 보자면,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설립자도 아니고 초대총장이 아니며 , 7대 총장이다. 그런데 권상로는 동국대의 설립자는 아니지만, 초대 총장이자 박사학위 소지자다.

김활란은 처음엔 3.1 운동 당시엔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후 일제에게 굴복하며 친일파가 되었다. 그런데 권상로는 을사늑약 이전부터 친일파 였다.

어찌 보면 이화여대생이 김활란을 청산하는 것보다 동국대생이 권상로를 청산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권상로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동국대의 활동은 아무것도 없다. 도리어 권상로를 한용운과 같이 말한 적 있다.

명진학교의 한용운부터 동국의 우리까지 … 111년의 이야기

https://www.dgu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49

8월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이외에도 불교포교사시험 검정위원, 불교법계고시위원회 위원장, 불교법규 위원, 불교성전 편찬위원, 문교부 국정교과서 교사위원(校査委員), 대한고서간행회 국역위원, 대한종교신도연맹 고문, 신라가야문화연구소 위원, 우리말팔만대장경편수위원회 위원장, 중앙불교연구원 원장,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조계종원로회 원장, 현대불교사 사장, 불교사상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많이도 해먹었다.

1965년 4월 19일 사망했다. 입적한 뒤 조계종에서 대종사(大宗師)의 법계를 받았다.

권상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65∼60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권영세(1885) : 

權寧世│安原淸禎, 1885.8.21~?,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1911년 대구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다음 학력은 알 수 없다. 친일인명사전에 '군수' 행적으로 등재되어있다. 1934년 9월 경북 영덕군수에 취임했고 1938년 3월~1941년 3월 경북 영주군수에 취임했다. 영덕,영주군수재직시 공적으로 지나사변공적조서에 등재되었다. 군수 퇴직 후 경북 대구부 사회과장 겸 국민총력과장, 1942년에 사회과장을 지내고, 1944년 10월 재단법인 경북구제회의 이사를 맡았다. 등등 더 많은 행적이 있다. 3대 대구부시장을 역임했다.(미군정시기) 초대 달성군수를 역임했다. 덴노가 칙서한 훈장 3가지, 훈8등 서보장(1932.9), 훈7등 서보장(1934.12), 훈6등 서보장(1936.12), 조선쇼와(昭和)5년국세조사기념장(1932.10)

권중현 : 

본명은 권재형 호는 경농, 안동 권씨, 1854년 11월 27일 충청북도 영동군 출생, 관리, 군인, 조선 귀족 자작 작위 받음, 1932년 3월 19일 79세 사망, 을사오적이며 친일인명사전 등재, 구한말의 대신이자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경농(經農)이다. 이름이 재형(在衡)이었으나 1903년 5월 중현(重顯)으로 개명하였다.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를 지낸 충장공 권율의 9대손인 아버지 권홍섭(權弘燮)과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인 어머니 덕수 이씨 사이에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가, 외가 전부 일본에게서 나라를 지킨 충신 가문인 그런 집안에서 매국노가 나온 셈. 초명은 재형(在衡)이었는데, 1903년에 안동 권씨 경중대종중보소에서 31世에서 60世까지의 대동 항렬을 제정하는 데에 참여하면서 본인의 이름도 그 항렬자에 맞게 '重顯'으로 개명하였다. 1854년 10월 8일 충청도 영동에서 출생했다. 대한제국기에 농상공부 대신, 의정부 찬정, 군부 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지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3월 22일 사망했다. 권중현의 가계는 위에서 언급했듯 공신 집안이었지만, 그의 6대조인 상기(尙琦) 대에 들어와서는 이렇다 할 관직을 배출한 조상이 없었다. 다만 그의 조부인 경호(景祜)가 1834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을 뿐이었는데, 권중현이 태어난 이후인 1861년에 비로소 아버지 권홍섭이 무과에 급제하여, 음서로 참봉을 시작으로 1877년에는 오위장에까지 올랐다. 이에 권중현 또한 공신 가문의 후예인 점과 아버지가 벼슬길을 먼저 닦아놓은 덕분에,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을사조약 당시에는 농상공부 대신을 지냈다. 농상공부는 현재의 농림축산식품부 및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해당되는 부처였다. 1905년 을사조약 때 당시 학부 대신 이완용의 조약 체결에 대일본제국이 조선의 백성들을 먹여살리고 입혀주신다면야 기꺼이 찬성할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억지 논리로 체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을사오적에 합류하게 되어서 민족 반역자가 되었다. 조약 체결 이후 다른 을사오적들과 함께 조선 의사 및 민중들의 습격을 받아서 출퇴근 때도 일본군의 호위하에 돌아다닐 정도였으며, 죽을때까지 암살범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면서 목숨을 연명하였다. 한일병합 이후로도 친일 행적을 계속하게 되면서 1910년 한일병합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몇년 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재곤과 작위 반납 의사를 밝혔지만 일본이 거절했다. 1934년까지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내고 자연사로 사망했다. 향년 79세. 참고로 을사오적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 살았다.

김경승 : 

김경승

김경천(金敬天) : 

김경천

김극일 : 

김극일

김기창 : 

이종찬

김길창 : 

이종찬

김대우 : 

이종찬

김덕기 : 

이종찬

김동원 : 

이종찬

김동인 : 

이종찬

김동하 : 

이종찬

김백일 : 

이종찬

김선태 : 

이종찬

김성수 : 

이종찬

김성용 : 

이종찬

김성태 : 

이종찬

김순례 : 

이종찬

김순흥 : 

이종찬

김연수 : 

이종찬

김용주 : 

이종찬

김우평 : 

이종찬

김원태 : 

이종찬

김은호 : 

이종찬

김응조 : 

이종찬

김인승 : 

이종찬

김일환 : 

이종찬

김정렬 : 

이종찬

김종원 : 

이종찬

김종필 : 

이종찬

김종한 : 

이종찬

김지태 : 

이종찬

김진태 : 

이종찬

김창룡 : 

이종찬

김태석 : 

이종찬

김형근 : 

이종찬

김활란 : 

이종찬

김흥배 : 

이종찬

김희선 : 

이종찬

나경원 : 조국 딸 논란에 소환된 나경원…靑 청원까지 등장
http://www.newspim.com/news/view/20190825000150

“나경원 자녀도 검증” 靑청원 비공개임에도11만명 돌파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90827000827

“조국 비판 나경원 자녀도 검증하자” 국민청원 11만 동의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8271069029736?did=NA&dtype=&dtypecode=&prnewsid=

조국 딸 검증의 불똥이 뜬금없이 나경원의 아들딸에게 튀고 있다

https://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457981

"교육부, 조국 딸 입시의혹 밝혀야" vs "나경원 딸 의혹도"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826_0000750787&cID=10301&pID=10300

“부울경 뭉쳐서 문재인 정권 심판하자” 지역감정 조장하는 나경원

표창원 "황교안·나경원도 자녀 의혹, 조국처럼 할 수 있나"

'나경원사학비리의혹' 실검 등장…검색어 전쟁

범여권, 나경원 '광주일고 정권' 발언 맹비난

나경원사학비리 의혹…장애인 딸까지 공격 받아 "교육 시킨다고 멀쩡해질 줄...

나경원 '사학비리 의혹' 제기…"정부보조금 수십억 받으면서 법정부담금 미납...

"장애있는 아이 위해 정치 입문" 발언..나경원사학비리의혹 수사촉구 폭발

민주당 부산 "지역감정 또 불러오는 나경원, 부산이 만만한가"

나경원 사학비리 의혹 또 부글부글 왜?...홍신학원 수십억 받고 1억만 납부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 

이종찬

노덕술 : 

이종찬

노수현 : 

이종찬

노주봉 : 

이종찬

노천명 : 

이종찬

노태우 : 

이종찬

류광렬 : 

이종찬

모윤숙 : 

이종찬

문명기 : 

이종찬

문예봉 : 

이종찬

문정창 : 

이종찬

민경욱 : 

이종찬

민규식 : 

이종찬

민병석 : 

이종찬

민영기 : 

이종찬

민영은 : 

이종찬

민영휘 : 

이종찬

민원식 : 

이종찬

민원식 : 

이종찬

박경원 : 

이종찬

박근혜 : 

이종찬

박마리아 : 

이종찬

박상준 : 

이종찬

박석윤 : 

이종찬

박순천 : 

이종찬

박승직 : 

이종찬

박영효 : 

이종찬

박영희 : 

이종찬

박용익 : 

이종찬

박임항 : 

이종찬

박정희 : 

이종찬

박제순 : 

이종찬

박종표 : 

이종찬

박중양 : 

이종찬

박춘금 : 

이종찬

박흥식 : 

이종찬

박희도 : 

이종찬

박희현 : 

이종찬

방응모 : 

이종찬

배상명 : 

이종찬

배정자 : 

이종찬

백낙준 : 

이종찬

백붕제 : 

이종찬

백선엽 : 

이종찬

백한성 : 

이종찬

버닝썬 : 

이종찬

사죄단 : 

이종찬

서범석 : 

이종찬

서정주 : 

이종찬

석진형 : 

이종찬

선우갑 : 

이종찬

선우순 : 

이종찬

선우영빈 : 

이종찬

성원경 : 

이종찬

손석도 : 

이종찬

손혜원 : 

이종찬

송병준 : 

이종찬

이종 : 

이종찬

스티븐유 : 

이종찬

승리 : 

이종찬

신기석 : 

이종찬

신상묵 : 

이종찬

신용욱 : 

이종찬

신응희 : 

이종찬

신태악 : 

이종찬

심영 : 

이종찬

아베 : 

이종찬

안용대 : 

이종찬

안용백 : 

이종찬

안용백 : 

이종찬

안익태 : 

이종찬

양재하 : 

이종찬

양주삼 : 

이종찬

양현석 : 

이종찬

어담 : 

이종찬

엄민영 : 

이종찬

엄인섭 : 

이종찬

여운홍 : 

이종찬

영선군 이준용 : 

이종찬

완순군 이재완



우덕순 : 한일병탄이 있기 직전인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안중근 의사에게는 거사를 함께 모의한 동지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우덕순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느 역에서 내릴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우덕순은 채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다. 역할 분담이었다. 거사의 영웅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거사 성공 뒤 안중근 의사는 순국했다. 우덕순에게도 징역 3년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10년 뒤인 1920년대 들어 우덕순은 이상 행적을 보인다. 일본 기밀문서 등을 보면 우덕순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주요 간부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당시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다. 정보 수집이 주요 역할이었다. 일반 한국인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면밀히 감시하고 정보를 끌어모았다.  우덕순이 일제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 등이 있다.

중국 지역 한국독립운동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다. 우덕순도 현재 독립유공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우범선 : 



원용덕 : 

이종찬

유만겸 : 

이종찬

유명한 : 

이종찬

유벤투스FC : 

이종찬

유성준 : 

이종찬

유억겸 : 

이종찬

유진오 : 

이종찬

유창렬 : 

이종찬

유치진 : 

이종찬

윤갑병 : 



윤덕영 : 경술국치를 주도했던 매국노, 친일파이며 동생은 윤택영이며 윤택영의 딸이 순정효황후라고 한다. 대가리가 커서 모자도 주문제작을 했다고 하며 "대갈대신"이라는 별명이 있고 여학생이나 첩을 옆에 끼고 궁둥이를 두드리며 노는 희안한 취미가 있었다고 하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 "아방궁"으로 불리는 "벽수산장"이라는 대 저택이 있었다. 친일파, 매국노 윤덕영은 조부 윤용선의 음덕으로 22세때 진사로 신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1908년 시종원이되고 1910년 친일파, 매국노 윤덕영은 1910년 경술국치에 지대한 큰 공(?)을 세웠고 특히 황후의 치마속에 숨겨놓은 옥새를 강제로 빼었다는 말도 있다. 친일파, 매국노 윤덕영은 고종을 압박하여 순정의 일본 천황 알현을 성사시켰으며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을 시킨 주인공이라고도 한다. 윤덕영은 1873년 12월 27일 서울 출생으로 1940년 지옥에 갔다. 67세까지 살았다. 지독히 오래 살았네... 본관은 해평이며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며, 후작 윤택영의 형이다.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이며 처는 애국금자회 회장 김복수이다. 위와 같이 친일,매국노 윤덕영은 외척의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제국 침략 정책에 일조하였으며 1917년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시종원경에 오르고 한일 병합 때인 1910년에 자작에 올랐고 1925년에 중추원으 고문, 1935년에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경술국적 친일파, 매국노 중 한명인 윤덕영이 매국을 한 대가로 누린 대저택이다. 현 서울 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해 있었다. 이름이 벽수산장이며 아방궁이라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의 본부로 사용되다 1973년에 철거되었다. 다만 여전히 터 주변은 UNCURK에서 따와 엉컹크길이라고 부른다.]



윤시병 : 



윤종화 : 

이종찬

윤치영 : 

이종찬

윤치호 : 

이종찬

윤형남 : 



을사삼흉 : 이하영, 민영기, 이재극



의양군 이재각 : 



이각종 : 

이종찬

이갑수 : 

이종찬

이광수 : 

이종찬

이규동 : 

이종찬

이규서 : 

이종찬

이규완 : 

이종찬

이근안 : 

이종찬

이근직 : 

이종찬

이근택 : 

이종찬

이긍종 : 

이종찬

이두황 : 

이종찬

이만수 : 

이종찬

이무영 : 

이종찬

이범승 : 

이종찬

이병도 : 

이종찬

이병무 : 

이종찬

이상범 : 

이종찬

이석기 : 

이종찬

이성근 : 

이종찬

이숙종 : 

이종찬

이영근 : 

이종찬


이완용 : 내각 총리 대신으로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한명이며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파입니다. 대한제국의 매국노,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1858년생이며 1926년에 사망했습니다. 일본으로 귀화. 본명 이완용, 일본명 리노이에 칸요, 1958년 7월 17일생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출신, 1926년 2월11일(67세) 사망, 나쁜놈은 명도 길어요. 장남 이승구, 차남 이항구, 손자 이병길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의 관료였다.

친청, 친미, 친러, 친일를 차례로 거친 민족 반역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을사조약 체결, 고종 강제 퇴위를 시켰으며 정미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탄조약 체결을 주도 하였다.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정미칠적(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성준), 경술국적(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을 주도한 매국노 중 최고 매국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이완용은 젊은 시절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총명함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결코 잊어버리면 안되는 친일파, 매국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만만치가 않다. 후손들은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고 소송를 제기하는 등 그 조상의 그 후손들이다. 이 나라에서 싹 싸잡아야 하는데 참 안타까울 뿐이다. 저 위 높은 분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답답할 뿐이다. 이완용은 그렇게 친일은 하면서도 생전에 일본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재산 : 재산은 민씨 척족 수구파 관료출신인 민영휘가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았가고 하고 그다음이 이완용이라고 한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 재산은 당시 돈으로 300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게되면 무려 450억원 가량 된다고 한다.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원~450억원이 넘고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었다고 한다. 얼마전 이완용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가 난적이 있다. 그리고 일부 후손들은 자신의 성씨를 바꿔가면서 이런땅을 찾는 행태에 대해 반대하기도 했다. 염치없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이완용 일가는 호의호식하며 당시 사치품이던 자동차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당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 캐딜락, 다임러, 오버랜드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본인은 위슬리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외에 이완용, 송병준 등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 포드, 쉐보레 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자동차와 관련해서 이완용 생전린 1912년에 그의 아들 이항구가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다 지나가던 어린이 다리를 부러지게 한 사건이 있는데 손해배상은 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백성들에게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 재산은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고 대부분 부동산 투기로 벌어들였다고 한다.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서울 여의도의 약8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 집도 여러번 옮겨 다녀 그당시 부동산 투기꾼이었다고 한다. 이완용의 땅 일부 중 후일 국가에 귀속시킨 땅이 10,900m2(약3천평) 인데 이는 이완용의 땅 0.05% 정도라고 한다. 몰수 원칙상 이완용이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개같은 법이....ㅌㅌ....그런데... 이완용 후손들이 소송을 걸어 되찾았고 그땅을 최대한 빨리 팔아 캐나다로 이민갔다고 한다.

이완용은 순종 때인 1908년 조선시대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중에는 윤원형처럼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책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 영수로 인조방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지금의 와서 그들은 재평가되고 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한것 보다는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 명목상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에 가깝다.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오늘 2019년 08월 12일 확인해 본 결과 역대 총장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을사오적의 한명인 박제순도 있다고 하는데 박제순도 안보인다.

억울하게 이완용과 관계를 오해받은 인물들도 있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같은 집안인 것뿐이고, 인완용의 고향으로 알려진 전라도도 잘못 알려졌고,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도 있다.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가 아니며, 촌수로는 30촌인데 그냥 남이다. 그리고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은 이완용의 손자 이름이 이병철이라고 한다. 본관도 다르고 한자 이름도 다르다. 이완용의 손자 이병철은 작위를 세습한 이항구의 아들이며,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경주 이씨 판전공파에 진주 향반 출신인 이찬우의 아들이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충격적인 사실도 있다.

이완용이 배항공신이 되어 최소 5년간 종묘에 모셔졌던 적이 실제 있었다고 한다. 1928년 5월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인 한방수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은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샹공신의 종묘 배향을 보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940년 3월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등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이완용의 신위는 출향 되었고,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고 다수 기록물에는 순종의 배향공신 송근수, 서정순 2명만 기재되어 있다. 

이완용의 정식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이다. 번역하며 이씨 가문의 완용이라는 뜻이다.

전라북도 부안군에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 공덕비는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 먹기 전에 세워진거라고 한다. 그 공덕비는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해일이 들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이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하여 지금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덕비가 그당시 세워졌고 이후 이완용의 공덕은 무의미해져 광복 후 그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으며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용구 : 

이용구

이원영 : 

이원영

이유립 : 

이유립

이윤용 : 

이윤용

이은재 : 

이은재

이응준 : 

이응준

이익흥 : 

이익흥

이재곤 : 

이재곤

이정 : 

청산리전투 김좌진의 최측근 비서이자 참모.  이정은 1920년 청산리전투가 있기 직전, 그가 몸을 담고 있던 북로군정서의 내부 상황을 일기로 남겼다. "진중일지(사령부일지)"다. 당시 우리 독립군의 내부 상황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현재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수록돼 있다. 그러나 이정의 이름은 일본 기밀분서에 등장한다. "진중일지"를 쓰고 난 4년 뒤인 1924년, 이정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 동지를 배신한다. 이정 그가 일본에 밀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일본 외무성 기밀보고서는 총57장이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다. 대한독립군의 모든것을 밀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이범석, 김규식 등 독립군 간부들의 인상착의와 특징, 군자금 모금 과정과 그 책임자들, 독립군의 현 재정 상태, 김좌진, 김원봉의 연합 의거 계획 등 온갖 치명적인 정보들이 이정에 의해 일제에 넘겨졌다. 학계 전무가들은 경악할 만한 밀고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 이정이라는 놈은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아 현재 독립유공자가 되어있다고 한다. 어찌 이런일이...

이종린 : 

이종린

이종만 : 

이종만

이종욱 : 

이종욱

이종찬 : 

이종찬

이종형 : 

이종형

이주회 : 

이주회

이지용 : 

이지용

이종찬 : 

이종찬

이종형 : 

이종찬

이주회 : 

이종찬

이지용 : 

이종찬

이진호 : 

이종찬

이태용 : 

이종찬

이태희 : 

이종찬

이토 히로부미 : 

이종찬

이하영 : 

이종찬

이항발 : 

이종찬

이해익 : 

이종찬

이협우 : 

이종찬

이호 : 

이종찬

이회광 : 

이종찬

이효석 : 

이종찬

이흥렬 : 

이종찬

이희덕 : 

이종찬

일본 : 

이종찬

임문석 : 

이종찬

임문호 : 

이종찬

임선준 : 

이종찬

자유한국당 : 

이종찬

장경근 : 

이종찬

장면 : 

이종찬

장석주 : 

이종찬

장우성 : 

이종찬

장은산 : 

이종찬

장지연 : 

이종찬

장헌식 : 

이종찬

전두환 : 

이종찬

전봉덕 : 

이종찬

전영택 : 

이종찬

정난교 : 



정비석 : 



정일권 : 

이종찬

정종선 : 

이종찬

정준영 : 

이종찬

정진동 : 

이종찬

정춘수 : 

이종찬

정훈 : 

이종찬

조두순 : 

이종찬

조용순 : 

이종찬

조중응 : 

이종찬

조중응 : 

이종찬

조진만 : 

이종찬

조한철 : 

이종찬

조희연 : 



주옥순 : 대한민국의 친박 극우 단체인 대한민국 엄마 부대의 대표로, 현재는 엄마방송이라는 이름으로 유튜버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은 뉴라이트 전국연합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그전에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갑툭튀한 이후 공교육살리기 학부모연합 공동대표, 전교조추방범국민운동 공동대표, NLL대책위원회 위원장, 나라지킴이전국여성연합 대표 등 수많은 감투를 썼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엄마 부대 대표을 맡고 있다.

엄마부대 대표로 활동하면서 자주 물의를 일으켜서 본격적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이 사람 덕분에 엄마부대의 이미지는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떨어져 버렸다.

2016년 한일 위안부 합의논쟁이 불거지던 시기에 강제징용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을 용서하자는 시위를 일으켜서 친일적 성향을 보였다. "자신의 딸이 위안부에 끌려가서 강간을 당해도 일본을 용서해 줄 거라고 한다" 라는 극악무도한 수준의 망언을 내뱉었다. 이에 다수의 네티즌들은 "왜 당장 위안부로 안보내냐"고 분노하고 있다.

2019년 일본의 대한국 경제 보복과 2019년 일본 불매운동의 와중인 2019년 8월 1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인한 한일관계의 악화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하며 "아베 수상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드립니다."며 아베 파이팅!을 외치는 등 저의가 심히 우려되는 친일 시위를 주도하였다. MBC 뉴스데스크와 스트레이트에 방송이 나간 후 네티즌들의 분노는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 본인은 아무리 사람들이 비판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뻔뻔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말로 점입가경이다.

세월호 참사를 모욕하고 유가족들에게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세월호가 곰탕이냐?"

한편 이런 행위를 한 보수단체들이 전경련한테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폭로가 나왔다.

주옥순은 대한민국 친박 극우 단체 '대한민국 엄마부대' 대표로 현재 '엄마방송'이라는 유튜버로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주옥순은 뉴라이트 전국연합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공교육살리기 학부모연합 공동대표, NLL대책위원회 위원장, 나라지킴이전국여성연합 대표 등 수많은 감투를 썼다. 하지만 주옥순은 엄마부대 대표로 활동하며 자주 물의를 일으켜 구설수에 올랐고 지금 엄마부대 이미지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주옥순 만행은 2016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을 용서하자는 시위를 일으키며 친일성향을 보였을 때다. 주옥순 딸이 위안부에 끌려가 그 짓을 당해도 일본을 용서해줄 거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그리고 3년 뒤, 2019년 8월 일본 수출규제에 이어 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외라는 경제 보복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주옥순이 또다시 등장했다. 

집회에 참여한 주옥순은 "아베 수상님 사죄드립니다"라며, 일본 파이팅을 외쳤다. 주옥순뿐만 아니라 집회에 참가한 많은 엄마부대 회원들도 문재인이 머리를 숙이고 일본에 사죄하지 않으면 일본과의 관계가 절대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주옥순 나이는 63살이다. 1956년 생이며, 슬하에 딸과 아들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도 있으며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주옥순 학력은 본인이 숙명여자대학교 정책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숙명여대 정책대학원에는 박사과정 자체가 없고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측에서도 주옥순이 2013년 1학기 대학 산하 연구소 객원교수 자격으로 수업 하나를 진행한 적은 있으나 겸임교수직을 준 적은 없다고 밝혀 학력위조 논란이 불거졌다.





주요한 : 

황신덕

진형하 : 

황신덕

채병덕 : 

황신덕

최남선 : 

황신덕

최린 : 

황신덕

최순실 : 

황신덕

최승희 : 

황신덕

최연 : 

황신덕

최운하 : 

황신덕

최재서 : 

황신덕

최정규 : 

황신덕

최정희 : 

황신덕

최태민 : 

황신덕

최하영 : 

황신덕

친일파(친일반민족행위자) : 

황신덕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황신덕

하판락 : 

황신덕

한동석 : 

황신덕

한상룡 : 

황신덕

한희석 : 

황신덕

허영호 : 

허영호

허진종(許振鍾) : 

허진종

현영섭 : 

현영섭

현제명 : 

현제명

홍난파 : 

홍난파

홍사익 : 

홍사익

홍인화 : 

홍인화

홍종철 : 

홍종철

홍진기 : 

홍진기

홍창섭 : 

홍창섭

홍택기 : 

홍택기

화이트리스트 : 

화이트리스트

황교안 : 

황교안

황신덕 : 

황신덕

황종률 : 

황종률

황철 : 

황철

흥친왕 이재면 : 

흥친왕 이재면

가네코 후미코 : 金子文子 (かねこ ふみこ)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일본아나키스트이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된 일본인 독립유공자입니다. 또한 박열의 아내입니다. 한국명은 박문자(朴文子).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틀 만에 치안 경찰법에 근거한 예비 검속으로 남편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덴노와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덴노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의문사하였습니다.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佐伯文一)는 히로시마현 아키군의 사족 집안 출신으로, 일본제국의 경찰관으로 근무하면서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 시의 소마구치(杣口)에 머물다가 농민의 딸이었던 후미코의 어머니 가네코 도쿠노(金子トクノ)와 결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는 등 가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결국 술과 도박에 빠져 경찰 자리에서 파면당하면서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태어난 후미코는 양친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출생 신고가 돼 있지 않아 소학교에 입학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어릴 적부터 호적에 없다는 이유로 비국민 취급을 받으며 큰 상처들을 입었고 이것이 후일 그녀의 무정부주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이후 아버지는 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가출하였고, 어머니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했습니다.

후미코는 8살 때 어머니를 따라 새 아버지가 살던 야마나시현 기타쓰루(北都留)로 갔지만 곧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 가네코(金子) 가문이 있는 야마나시현 히가시 야마나시군 스와촌 오오아기 소마구치(같은 군 마키오카, 현 야마나시시)에 가서 자랐습니다.

후미코가 9살 때 생부의 여동생, 곧 고모가 결혼한 조선 충청북도 청주시 부강면에 있던 고모부 이와시타(岩下)의 집에 맡겨졌습니다. 사위의 집에 살고 있던 후미코의 친할머니는 후미코를 친손녀로 인정하지 않았고, 후미코를 외조부의 5녀로 입적시켰고 고모와 함께 후미코를 식모처럼 부려먹으며 학대했습니다. 조선에 와서도 친척들에게 학대를 받자,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갑갑한 친척들과의 일본인 마을 생활과 달리, 우연히 가게 된 조선인 동네에서는 그녀에 대한 차별 없이 똑같은 아이 대우를 해주었고 굶주린 그녀에게 먹을 걸 내어주기도 하는 등 따뜻한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야 없겠지만, 학대받으며 굶주린 죄 없는 소녀를 그저 일본인이라고 배척하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1919년, 후미코는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올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후미코는 조선인의 입장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여,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후미코는 1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때까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해, 재혼하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후미코는 당시의 상황을 "집 없이 나는 며칠씩 인근의 친척 집을 방황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외가와 짜고서 후미코를 재산 많은 스님인 작은외삼촌에게 강제로 시집보내려 하였습니다. 이에 반발을 품은 후미코가 학문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고 야마나시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면서 외가와 헤어지고 1920년 4월, 17세 되던 해에 도쿄로 상경합니다. 도쿄로 상경한 후 어머니 쪽 친척 집에 머물면서 우에노(上野)에서 신문팔이와 노점상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일하면서 마사노리(政則) 영어 학교와 연수 학관을 다녔습니다.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사귄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접했고 이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후미코는 1920년 7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계속 사회주의 책과 잡지를 탐독했으며, 1921년 여름 무렵, 유학과 기타 이유로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1921년 11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岩崎) 오묵 집의 종업원으로 들어갔습니다.

1922년 3월, 후미코는 박열과 만났고, 5월부터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후미코는 동거남 박열을 따라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흑도회는 9월,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로 분열되었고, 이후 박열과 홍진유(洪鎮裕), 박흥곤(朴興坤), 신염파(申焔波), 서상일(徐相一), 장상중(張祥重)이 함께 조직한 흑우회(黑友會)에 김중한(金重漢), 니이야마 쇼다이(新山初代), 쿠리하라 카즈오(栗原一男)와 함께 가입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太い鮮人)>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했습니다.

이듬해인 1923년 4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고, 3월부터 살던 도쿄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정했습니다. 5월 27일에 불령사 첫 모임을 했습니다. 후미코는 재판에서 불령사의 성격을 "권력에 반역하는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대담한 조선인>을 <현사회(現社會)>라는 제목으로 바꿨고, 후미코는 이 잡지에 계속 글을 실었습니다. 6월에는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였던 모치츠키 가쓰라와 가토 가즈오의 강연회를 열고, 나카시니 이노스케(일본의 노동 운동가)의 출옥 환영회도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박열이 이전부터 은밀히 추진했던 폭탄 입수를 둘러싸고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령사는 점점 갈등이 커지게 되고, 같은 시기 흑우회가 해산되자, 니이야마와 김중한은 불령사를 나와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후미코는 박열과 예비 검속을 핑계로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수사 도중 폭탄 입수 계획이 밝혀지자, 일본 당국은 이를 형법 73조(대역죄) 위반으로 두 사람을 기소하였습니다. 당시 후미코는 "다이쇼 덴노는 병자이기 때문에 히로히토 황태자를 엿보려 했다"라고 했지만,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사를 받으며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다른 불령사 동지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계속 수사를 받았습니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열은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나는 박열이다”고 답했습니다. 후미코 또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했습니다.

1926년 3월 26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라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후 4월 5일 천황에 의해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후미코와 박열은 옥중에서 혼인하였고, 후미코는 박열의 호적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 7월 23일 의문사 하였습니다. 일본은 후미코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하였으나, 일본의 발표에 의구심을 품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동료들은 후미코의 어머니와 함께 시신을 확인해 보았지만, 끝내 사인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후미코 추모 열풍이 불 것을 염려하여, 후미코의 어머니와 동료들을 검속하기도 했습니다.

법적으로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에, 조선에서 박열의 동생이 와서 후미코의 유해를 모셔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유골을 직접 주지 않고 조선의 경찰서로 보냈습니다. 경찰서에서 유골을 인수 한 박열의 형은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후미코를 매장하였습니다. 후미코가 남긴 원고는 쿠리하라 카즈오가 정리하여 시집과 자서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후미코의 묘는 본래 주흘산에 있는 박열 집안의 선산 지역(문경읍 팔령리)에 있었는데 2003년 박열의 생가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세우면서 후미코의 묘를 기념관 경내로 이장했습니다.

1976년 3월, 야마나시 현 마키오카 소마구치에 있는 후미코의 생가터에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는 비가 세워졌습니다.


[영화속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신문에 실린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2017년 6월, 박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박열>이 개봉하였습니다. 박열 역은 배우 이제훈이 맡았고, 가네코 후미코 역은 배우 최희서가 맡았습니다. 최희서는 가네코 후미코 역을 잘 소화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2018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생을 마감한 지 9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었습니다. 박열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 92년만 독립유공자 인정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 훈장은 일본 현지의 후손이 보관하였다가, 2019년 7월 23일 후미코 추도식에 맞춰서 추모 단체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를 통해서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에 기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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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쓰지(후세 다츠지) :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수훈자입니다.

生いきべくんば 民衆みんしゅうとともに、死しすべくんば民衆みんしゅうのために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일본의 인권 변호사이며 사회운동가입니다.

현재까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두 명밖에 없는 일본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며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입니다.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묵자의 겸애 사상을 접했으며 한때 정교회 신학교까지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자퇴하였습니다. 톨스토이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검사로 활동하던 중 생활고로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 법률의 미비점과 적용에 대한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1911년에 그는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술국치가 침략임을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쓴 것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조사 받습니다.

이후 그는 주로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1919년에는 2.8 독립 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 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23년에 밀정의 실존 인물 김시현황옥의 변호,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 단원인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한편 1923년에 발생했던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이 일본 정부와 일본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입니다. 두 사람은 덴노를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검거되어서 덴노 폭살을 기획한 혐의로 법정에 섰습니다. 이 재판은 박열 대역 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후세 다쓰지[布施 辰治(ふせ たつじ)후세 다츠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 결혼 수속을 대신 해 주었습니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가 의문사하자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매장을 해 줄 정도로 노력하였습니다.

자유법조단의 창립 멤버이며 1928년 제16회 중의원 총 선거에서 노동 농민당 공천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 되었습니다. 1932년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도중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가 법정 모독이라는 근거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했고,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였으며 신문지법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 받아 복역하기도 하였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뒤엔, 한신 교육투쟁(한신 교육 사건)이나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 등, 재일 한국인 사건 및 노동 운동에 대한 변호를 맡았습니다. 1946년에는 한국을 위한 조선 건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후 6.25까지 목격한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9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을 한국의 독립 운동의 변호에 힘써서 노력해왔던 것에 대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후세 다쓰지[布施 辰治(ふせ たつじ)후세 다츠지] 본인이 이미 고인인 관계로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 씨가 대신 전달받았습니다. 

이전까진 독립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것인데 "아무리 조선을 도왔다고 해도 우리의 원수였던 일본의 국민을 독립 유공자로, 건국 기여자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반대와 우려가 많았으나, 그의 경우 일생 동안의 행적이 명백하고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에 도움을 준 것이었고 자국에서도 온갖 탄압과 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헌신을 한 점을 매우 높게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업적 자체에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으나, 일본인이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을 한 적 있다는 점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데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서훈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참여정부 집권 시절인 2004년에 이르러 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추서 당시 유일한 일본인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였고, 2018년 후세 다쓰지[布施 辰治(ふせ たつじ)후세 다츠지] 본인이 직접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에게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일본인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가 2명이 되었습니다.

웬만한 독립 운동가들의 공헌도를 내려도 될 정도로 엄청난 업적들을 보면 역사 교과서에도 충분히 나올법하지만 지학사 교과서를 제외하면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탓에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입습니다.

다행히 2014년 10월 30일, EBS의 《역사 채널 e》에서 방송된 〈조선 민중과 함께, 후세 다쓰지[布施 辰治(ふせ たつじ)후세 다츠지]〉편 덕분에, 국내에도 그의 업적이 조금이나마 알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 박열에 등장합니다.



어제 2019-08-13 KBS 시사기획 창에서 방송 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 밀정 1부 배신의 기록] 영화로도 잘 알려진 '밀정'은 우리 독립운동 진영의 치명적 정보를 일제에 은밀히 빼돌린 사람을 말한다. 그동안 학계와 언론계 통틀어 밀정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사실상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KBS 탐사보도부는 입수한 5만 장의 기밀자료를 토대로 밀정 혐의가 짙은 한국인 895명을 특정했다. 취재진이 주목한 밀정 혐의자들 가운데에는 현재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조만간에 895명의 밀정 명단을 공개하겠습니다.

아래는 해당 영상 입니다.

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1-1097&program_id=PS-2019124068-01-000&sect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sub_code=06

참고 사이트 : 

나무위키-친일반민족행위자 ,

나무위키 - 경술국적 ,

위키백과 - 친일파 ,

위키백과 - 정미칠적 ,

나무위키 - 친일인명사전 ,

아이들의 세상 ,

 KBS 탐사보도부 시사기획 창

나무위키-주옥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고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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