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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천주교 서울대교구

[천주교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

by 섹시맘1004 201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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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149-2(중구 청파로 447-1(중림동))
전화번호 : 02-392-5018
홈페이지 : http://www.yakhyeon.or.kr
미사시간 :
일 06:00(새벽미사) 09:30(학생미사) 11:00(교중미사) 18:00(청년미사)
월 06:00
화 10:00 19:00(매월 첫째 화요일-저녁 미사후 성시간)
수 06:00 10:00
목 10:00 19:00
금 10:00(성지미사)
토 18:00(토요특전) 





지도를 클릭하시면 위치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약현성당 소개 : 

1891년 박해가 끝나고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약현성당을 세웠습니다.

중림동 약현 성당은 본래 1887년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공소로 출발하였습니다.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래 무수한 박해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던 교우들이 도성 문 밖만 해도 수백을 헤아렸습니다. 

이에 제7대 조선대목구장(교계제도 설정 전의 교구를 대목구라 합니다) 블랑 주교는 1887년 지금의 중구 순화동 지역인 남대문 밖 수렛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교리 강습을 위한 강당을 차렸는데, 이것이 약현본당의 시작인 약현공소입니다. 

공소가 설립된 뒤 신자가 나날이 늘어나자, 종현 본당(현 명동성당)의 두세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을 얻어 1891년 약초가 많아 약초고개, 즉 약현이라고 불리던 언덕을 매입해 성당 건축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1891년 10월 27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설립 기념일에 성당 정초식이 거행되고, 같은 해 11월 9일 두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약현본당이 정식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종현(명동)본당에서 분리되어 서울에서 2번째, 전국에서 9번째로 설립된 본당입니다. 

당시 약현본당의 관할구역은 서울 도성의 외곽 지역뿐 아니라 경기도와 멀리 황해도 백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는 명동성당의 설계의 핵심을 담아 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 착공 1년만인 1892년 약현성당을 건축하였습니다. 

1898년 종현에 세워진 명동성당 보다 6년 먼저 세워진 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사적 제252호). 

당시 교구장이신 뮈텔주교님께서는 견고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좋은 흙이 필요했었는데, 당시에 가장 좋은 흙은 왕궁의 기와를 굽던 와서현(지금의 국군 중앙성당)의 흙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해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남종삼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의 시신이 약 43년간 묻혀있던 곳입니다. 

그곳의 흙으로 세워진 약현 성당은 바로 순교성인의 살과 피로 세워진 성당이며 서소문 형장을 바라보는 서소문 성지 기념 성당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건축되는 벽돌식 성당의 원형(prototype)이 되었습니다. 

완공된 지 4년 뒤인 1896년 4월 26일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 두 차례 거행되어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강성삼 라우렌시오 신학생 3명이 사제로 서품되고, 1년 뒤인 1897년 12월 18일에는 두 번째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어 한기근 바오로, 김성학 알렉시오, 이내수 아우구스티노가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종현(명동)성당은 4대문 안 선교를 담당했다면, 약현성당은 4대문 밖, 경기도부터 멀리는 황해도까지의 선교를 담당하면서 넓게 퍼져있는 신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이후 교회의 발전 속에서 약현성당은 약 90여개 성당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초대 주임인 두세 신부는 남달리 교육열이 높아 1895년 약현서당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쳤고, 이후에도 교육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1901년에는 성당 구내에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가명학교(可明學校, 가명은 두세 신부의 본명인 가밀로를 한자로 표기한 것)를 세우고, 1906년에 건물을 신축해 남자 어린이를 위한 약명학교(藥明學校)를 설립했습니다. 

1909년에는 교사를 증축하고 남녀 학교를 통합한 가명학교를 만들었다. 

두세 신부의 후임 비예모 신부는 성당 내부의 남녀 칸막이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대체하는 등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했으며 1920년 9월 30일에는 최종철 마르코가 본당 출신 첫 번째 사제로 탄생했습니다. 

1938년 11월 3일에는 언구비(현 논현동)에 있던 약현 묘지에 순교비를 건립했습니다. 

한국 전쟁 후 1954년 3월 19일 서울대목구와 가톨릭자선회의 지원으로 본당 구내가명학교 자리에 병상 62개 규모의 성요셉의원을 개원했고, 5월에는 성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를 세워 전문 인력 양성과 극빈자 진료에 힘썼습니다. 

이후 이 학교는 1955년 가톨릭대 의학부와 부속병원인 성모병원이 되었습니다. 

1968년 2월 24일에는 서울시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잠실에 있던 언구비 본당 묘지가 폐쇄되고,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임야 43,050평(142,314㎡)을 매입해 이듬해 6월 분묘 이장을 완료했습니다. 

1979년 5월 주일학교 교실을 이용해 평일 야간에 고등학교 과정과 타자 교육을 실시하는 성이냐시오 학교를 개설해 환경이 어려워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교육의기회를 제공했고, 1982년 5월에는‘우리 신학생은 우리 힘으로 키운다’는 신자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약현장학회를 설립했습니다. 

1984년 12월 22일 순교 성인 44인의 명단과 순교 역사를 수록한 7개의 조각물을 세운 높이 18m의 순교자 현양비 제막식이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거행되었으며 1986년에는 전례음악을 역사적으로 수집하고 보호, 발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가톨릭종교 음악연구소를 본당 구내에 이전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해 100주년이 되는 1991년까지 기념사업과 성역화 사업을 전개하기로 했고, 1990년 4월 22일 서소문순교자기념관 기공식을 거행했습니다. 

1997년에는 서소문공원 재개발로 순교자 현양탑을 본당 내 14처 기도동산으로 옮겨 왔습니다. 

1998년 2월 11일 본당 건물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훼손된 것을 복원하여 2000년 9월 17일 정진석 대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2000년 10월에는 ‘정하상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2007년 7월 19일 중림동성당의 명칭이 중림동약현성당으로 변경되었습니다. 

2009년 9월 13일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을 개관했고, 2010년 3월 5일부터는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에서 매주 금요일 성지 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약현성당의 건축사적 의미 : 



사적 제 252호로 지정된 중림동 약현 성당은 박해시대 때 참형장이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서소문 근린 공원)를 내려다 보는 가파른 약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886년 한불 조약 이후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신자가 증가하자 서 소문 밖 수레골에 한옥 공소를 마련하였는데 1890년경에 이르면 이곳 문 밖 공소의 신자 수가 문 안 본당(종현본당, 현 명동본당)을 능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곳에 새로운 본당을 창설하기로 하고, 1891년 대지를 매입한 후 성당 건립에 착수하여(1891년 10월 27일) 1년 만에 준공(1892년 9월)하고 1893년에 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첫 벽돌조 서양식 성당 건축물인 약현 성당입니다. 

약현 본당의 설계자는 당시 부주교였던 코스트신부(Eugene-Jean Geroges Coste)입니다. 

그는 1842년 프랑스 남부 Montpellier에서 태어나 1866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며, 1868년 사제 서품을 받고 바로 극동으로 파견되었습니다. 

1874년 상해의 경리부를 맡으면서 조선 포교를 청원, 승인받아 이 후 조선 입국의 기회를 엿보며 한국어 활자를 주조하는 등 인쇄일에 관여하다가, 1885년 조선 입국 이후 건축물의 설계와 시공에 있어서 조선교구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의 축소판이며, 시험작이라 할 수 있는 약현성당의 평면 구성은 삼랑식(三廊式)이며 줄지어 늘어선 기둥의 아치(아케이드 arcade 홍예랑)와 천장에 의해 중심부(네이브 nave)와 측랑(아일 aisle)의 구분이 내부에서는 뚜렷하나 외부에서는 낮은 단층 지붕으로 되어 있어 그 구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 출입구는 정면 중앙에 돌출된 정방형 종탑 하부에 위치하며, 좌우 양쪽에 부 출입구가 돌출되어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당의 내부는 중심부와 좌우 단열의 측랑으로 구성된 7개의 회중석 베이(bay;기둥과 기둥의 사이)와 보다 큰 한 개의 성단(sanctuary;지성소) 베이 및 3강의 돌출 앱스(apse;성당에서 돌출된 반원형의 부분)로 구성되었는데 성단의 좌우칸은 제의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심부의 폭은 측랑의 2배이며 천장은 네이브가 뾰죽한 원통형 둥근 천장(Pointed barrel vault)인데 반해 통로 반원형 베럴 보울트로 되어 있고, 둘 다 각 베이마다 목조 횡단 리브(고딕 건축 등의 천장 능선에 부착되어 있는 돌기물)가 붙어 있습니다. 

천장 보울트는 명동 성당을 비롯한 모든 서양식 교회 건축과 같이 구조적 개념의 둥근 천장이 아니고 목재에 의한 장식적 의(擬) 보울트(vault)입니다. 실제로 약현 성당의 외부의 지붕은 큰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부 열주는 8각 돌기둥으로 주두 위에 반원형아치가 구성되어 아케이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개조공사(1921) 이전에는 원래 벽돌조 기둥이었으며 중앙에 남녀석 구분의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고, 1974년 대보수 이전에는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었습니다.

 

내부 벽면은 단층으로 명동 성당과 같은 트리포리움(triforium;교회의 신자석 및 성가대석 측벽(側壁)의 아치와 지붕과의 사이의 부분)이나 크리어스토리(clerestory;고딕 건축 대성당의 aisles의 지붕 위의 높은 창이 달려 있는 층)의 구성은 없습니다. 

창(窓)의 형태는 반원형이나 멀리온(mullion;방사성 창살)으로 잘린 창의 반절에서 각기 뾰죽 아치를 이루어 고딕의 맛을 내려하고 있고 정면 중앙의 종탑은 탑신, 종루, 첨탑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탑신 부분은 다시 현관과 2층 갤러리의 원화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종루는 사방이 2연 비늘창으로 되어 있고, 첨탑 하부의 처마에는 코오벨(corbel;무게를 받치기 위한 벽의 돌출부)식의 벽돌 내쌓기와 이형(異形) 벽돌에 의한 쇠시리(molding) 장식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꼭대기 첨탑은 하부의 4각에서 8각으로 꺾인 도머(dormer;지붕창) 창을 가진 급경사의 8각 첨탑(broached spire)으로 되어 있습니다. 

약현 성당은 고딕적 요소가 극히 적은 바실리카식 벽돌조 건물이지만 최초의 양식(洋式) 교회 건축이자 본격적인 벽돌조 건물로서 건축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건물입니다. 

또한 1900년 이전의 몇 안되는 양식(洋式) 건축물 중 일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서양으로부터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명동 대성당과 함께 한국 근대 건축사의 주요한 서두를 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명동대성당 만큰 완전하고 순수한 서양 중세 양식을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명동 대성당의 건축에 앞서 교회 건축과 서양 건축의 핵심적인 여러 요소들이 채택되어 시험되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즉 내부 공간의 분절화(分節化), 벽돌의 자작(自作) 생산과 이형 벽돌의 사용, 목재 의 보울트 등에 의한 서양식 벽돌조 건축의 구현 등은 이 후 교회 건축 뿐만 아니라 병원, 학교, 관청 건물 등의 초기 서양식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첫 벽돌조 고딕 건물로서 건립된 약현성당은 세월의 흐름과 6.25 전란을 통하여 많은 파손 및 노후화의 과정을 겪었고 이에 부분적인 보수공사를 했지만, 외부 벽돌이 노화 및 여러 문제가 야기되어 1974년 8월 13일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6년 4월 25일 본당 건물 복원식을 거행했으며 이듬해 11월 22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교회 건물인 중림동성당이 명동대성당(사적 258호)과 더불어 사적 제252호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1998년 2월 11일 오전 9시경에는 본당 건물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성당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고 종탑 일부가 훼손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같은 해 3월 성당 재건을 위한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한 설명회가 개최되고, 성당 재건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화재 발생 2년 만에 성당을 건립 당시의 옛 모습과 더욱 가깝게 복원되어 2000년 9월 17일 정진석 대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김정신 교수(단축대학교 건축학과), 약현 본당 백년사, pp113~117 중에서 편집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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