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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103위 순교성인

[천주교/103위 순교성인] 성 정하상 바오로

by 섹시맘1004 201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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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하상 바오로(9.20)

성인명 :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

축일 : 9월 20일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신학생,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95-1839년

같은이름 :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정 바오로, 정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정하상(1795∼1839). 성인. 축일은 9월 20일. 본관은 나주(羅州),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부친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柳∼)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情惠)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峴, 京畿道 楊州郡 瓦阜面 陵內里 마재부락]의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趙曾伊) 집에 의지하며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請願)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왕국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 “저희들은 교황성하께 두 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두 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 신부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인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동정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카펠라리(Capellari)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소속의 전교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Brugiere) 주교의 조선전도 자원이 있어 마침내 1931년 9월 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등극]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로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迎入)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로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로 장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로 정하상은 생명의 극(極)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 (⇒) 기해박해, 정약종 (李元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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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는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Elisabeth)과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살길이 막연하여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인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으므로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아누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에 다시 끌려나와 톱질 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고 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인터넷 굿뉴스 http://www.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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