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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병합(韓日倂合) - 경술국치조약, 일제병탄조약

by 섹시맘1004 201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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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병합(韓日倂合) - 경술국치조약, 일제병탄조약

 

요약 :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강압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국과 일본과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1910년 8월29일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왕조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한국은 나라가 없어졌다.

 

내용 :

일본은 병합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이 되어 있었다.

1909년 8월 22일 순종황제 앞에서 형식만의 어전회의를 거치게 하고 그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을 하였다.

조약은 1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1909년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을 시켜 황제의 어새를 날인하여

이른바 칙유와 함께 병합조약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왕조, 대한제국 이라는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인용 사이트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1419&mobile&categoryId=200000237

인용 사이트 :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C%9D%BC_%EB%B3%91%ED%95%A9_%EC%A1%B0%EC%95%BD#.ED.95.9C.EC.9D.BC_.EB.B3.91.ED.95.A9

 

반대 대신 : 학부대신 이용직

찬성 대신(경술국적) :

경술국적(庚戌國賊)은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이완용의 처남인 승녕부총관 조민희 여덟 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합방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전원 선정되었다.

 

       이름               생존연대  (당시 나이)        당시 직위                  이후 경력
이완용 (李完用)      1856년~1926년 (55세)      내각총리대신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윤덕영 (尹德榮)      1873년~1940년 (38세)      시종원경                자작, 중추원 부의장, 일본 귀족원 의원
민병석 (閔丙奭)      1858년~1940년 (53세)      궁내부대신             자작, 중추원 고문
고영희 (高永喜)      1849년~1916년 (62세)      탁지부대신             자작, 중추원 고문
박제순 (朴齊純)      1858년~1916년 (53세)      외부대신                자작, 중추원 고문
조중응 (趙重應)      1860년~1919년 (51세)      법부대신                자작, 중추원 고문
이병무 (李秉武)      1864년~1926년 (47세)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자작
조민희 (趙民熙)      1859년~1931년 (52세)      승녕부총관             자작, 중추원 고문

 

 

 

한일 병합 조약시 전권위임장.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坧)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坧은 순종의 친필이 아니다.

 

 

 

한일합방 조약 조인서

1910년 8월 16일,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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