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이들의 교육/아이들의 역사

덕혜옹주 [ 德惠翁主 ]

by 섹시맘1004 2012. 12. 11.
반응형

덕혜옹주




출생 : 1912년 5월 25일

사망 : 1989년 4월 21일

본관 : 전주

본명 : 이덕혜

출생지 : 서울


1912년 고종의 고명딸이다.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 하였다.

조발성치매증을 앓았다고 한다. 

결혼 후 병세가 더욱 악화 되었고 이혼, 딸의 자살등 비극을 겪었으며 1962년 귀국하여 편치 않은 여생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기에 옹주라고 한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못되어 사망하여 덕혜옹주는 고종의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외동딸이었다.

1916년 즉조당에 유치원을 개설하고 덕혜옹주는 여기에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했다.

1919년 일제에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은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햇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라는 소학교에 다녔다.

이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만 다녔던 학교였다.

옹주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 덕혜라는 호를 내려 받았다.

1925년 3월 일본은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가야만 했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동경까지는 열차로 이동을 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동경에 도착하여 이방자 여사가 마중 나왔다.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다.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도 어울리지 못하였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치 않고 1927년 1주기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 몽유증 증세기 나타나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였다.

1932년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여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였다.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을 하였지만 실패하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일부에서는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덕혜옹주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 되었다.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 만의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구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 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참고 인용 : 네이버 지식백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