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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1212 군사반란,전두환,노태우

by 섹시맘1004 201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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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 / 1212 군사반란





10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으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하고 사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승인을 받았다.


그러면 1212사태/군사반란은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는가??

10.26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뒤 군부에서는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 사건 수사와 군인사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하나회)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 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을 합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도 접촉을 합니다.

그리고 12월 초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합니다.


12월 12일 저녁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등은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합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을 합니다.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됩니다.

연회중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등의 육군 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이미 전두환은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 시킨 후 였다.


이와 같은 사태들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 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의 연행 재가를 하게 설득합니다.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13일 새벽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 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1212사태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 세력에 의해 정당화 되었으나 이후 김영삼 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을 하게 됩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을 했습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합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반란군과 진압군


군사 반란 당시 하나회 핵심 인물

보안사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육군본부 합동수사본부장 (소장)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대령)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대령)

이학봉 보안사 수사과장 (중령)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대령)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대령)


수경사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중령) (33헌병대는 청와대 경호실 배속부대이나,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본부장:전두환)에 임시로 배속됨 )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중령)

육군본부 및 국방부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불법연행에 직접 관여)

성환옥 육군본부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변규수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준장)

사단 군단 및 여단 제군 사령부

차규헌 육군 수도군단장 (중장)

황영시 육군 제1군단장 (중장)

최동수 육군 제1군단 헌병대장 (대령)

백운택 육군 제71방위사단장 (준장)

박준병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박희모 육군 제3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노태우 9사단장 (소장)

정호용 50사단장 (소장)

구창희 9사단 참모장 (대령)

이상규 제1기갑여단장 (준장)


특전사

박희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최세창 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장기오 특전사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이기룡 제1공수특전여단 참모장(대령)

박종규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 (중령)

대통령(청와대) 경호부대

고명승 대통령(청와대)경호실 작전과장 (대령)

정동호 대통령(청와대)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10.26사건 당시 이재전 대통령(청와대)경호실 차장 (중장) 직속부하)


진압측 인물

수경사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김기택 수경사 참모장 (준장)

김수택 비서실장 (중령)

박동원 수경사 작전참모 (대령)

구명회 수경사 야포단장 (대령)

특전사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김오랑 비서실장 (소령)

이순길 특전사 부사령관 (준장)

윤흥기 제9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신수동 제9공수특전여단 참모장(대령)

사단 및 군단 제군 사령부

이건영 제3군사령관 (중장)

배정도 제26기계화사단장 (소장)

손길남 수도기계화사단장 (소장)

육군본부 및 국방부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종환 합동참모의장 (대장)

류병현 연합사부사령관 (대장)

존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 (대장)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중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중장)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준장)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안종훈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소장)

구정길 육군본부 헌병경호대장 (중령)

천주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소장)

이범진 국방부 소속 (소장)

김광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비서실장 (중령)


기타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총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대장)

김인선 육군참모총장 경호 대장 (대위)

이재천 육군참모총장 부관 (소령)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 (중장)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준장)



전두환 [ 全斗煥 ]


군인, 정치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출생 : 1931.1.18 ~

본관 : 완산(完山)

호 : 일해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경남 합천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수용하였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물러난 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되어 사법처리되었다.




노태우 [ 盧泰愚 ]


한국의 군인·정치가.

제13대 대통령(재임 1988~1993).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대통령 재직 중 러시아, 중국과의 국교를 수립하였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國仙章),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출생 : 1932.12.4 ~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대구에서 태어났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 1968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공수특전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29선언’을 발표, 정국(政局)을 대화합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 12월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0년 2월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함께 3당을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킴으로써 4당체제에서 양당체제로 정계를 개편하였다.

그 해 6월과 이듬해 4월에 러시아 대통령 M.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으로 한·러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5년에는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모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는 등 대통령 재직시의 사건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었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國仙章), 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에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가 있다.




제5공화국 [ 第五共和國 ]



1981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지속된 한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

1979년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후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정호용(鄭鎬溶) 등의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이 주도하여 수립하였다.

이들은 12월 12일 군대를 동원하여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를 연행함으로써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2월 21일 최규하(崔圭夏)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실권은 신군부세력에게 있었다.


1980년 4월 사북(舍北)탄광 노동자 파업, 5월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17일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5월 27일 계엄군을 광주(光州)에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되고,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2월 초 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이 창당되었고,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그리고 1인 장기집권을 배격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고 중임을 금지하였다.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추천하게 한 제도를 폐지하고,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대통령의 일반법관 임명권을 폐지하고 대법원장이 그 권한을 갖게 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고, 군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는 등 유신잔재 청산에 미흡한 모습을 보였다.

경제분야에서는 과거 성장제일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저물가·저금리·저환율의 3저(三低)정책과 부동산 투기억제 등 안정우선정책을 추진하였다.


외교분야에서는 1983년 1월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방한하였고,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방한하는 등 정상외교를 벌이는 한편, 소련·중국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스포츠분야에서는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유치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5공화국은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성립된 군사독재정권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탄생한 이 정권은 물가안정,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부정부패와 민주화운동탄압, 고문 등의 인권유린행위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마침내 1987년 6월에 일어난 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어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하나회


하나회(하나會)는 1963년에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이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의 각 기수를 내려오면서 주로 경상도 출신 소장파 장교들을 대상으로 3-4명씩 회원을 계속 모집하였다.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22기-23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적으로 구성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육사 31기까지도 계속 모임이 결성되었고, 1993년 초에는 육사 31기생이 동기회장을 놓고 난투극을 벌인 끝에, 서울 용산의 군인아파트에 회원 명단이 살포되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육사 11기, 12기생을 중심으로 신군부로 발전하여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를 주도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압 과정에도 참가했으며, 1995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창설 초기

1951년, 4년제 육군 사관학교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생도,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 등 5명이 5성회를 조직한 것이 시초이다. 전두환 주도로 육군사관학도들은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5성회는 회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확대 개편 과정을 여러번 거쳤다. 이들은 1963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육사 8기를 몰아내기 위해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동향 출신 세력을 키우고자한 박정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나회에 가입하기 위해서 가입 대상자는 보스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서약 절차를 거쳤다.

하나회의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을 복종한다.

하나회원 상호 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이상의 서약을 위반할 시 '인격말살'을 감수한다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보안사령부 내사과 등의 진급 담당 요직을 점거하여 승진이나 자리이동때 선배가 후배를 추천하고 밀어주는 식으로 군내 주요 요직을 독점하였다. 1973년 윤필용 사건에서 수사 도중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조사한 하나회는 정규육사 출신을 기본 정원제로 가입, 10명 내외로 (2) 회원 다수는 영남 출신이 점한다. (3)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케한다. (4) 고위층으로 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징수 회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진급 및 보직 상의 특혜 라고 밝혀졌다. [2]

팀의 초기 리더는 윤필용과 전두환 등으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한풀 꺾이지만, 조직의 다른 우두머리인 전두환은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으로 복귀, 그에 대한 박정희의 각별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나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며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세력이 되었으며, 서로에 대해 "형님"이라는 암호명으로 서로가 하나회 멤버임을 과시했다.


12.12 군사반란 및 5.17 쿠데타

1979년에는 10·26 사건 이후 육사 11기, 12기생 회원들을 중심으로 권력공백기를 이용하여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군내 각 요직에 배치된 하나회 회원들이 보안사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뜻에 따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12·12 군사 반란이후 하나회 인사들은 군의 핵심 요직에 올랐다. 또한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및 육군참모총장에, 황영시를 육군참모차장에 직접 임명하였다. 12.12에 참여한 하나회 회원과 12·12 군사 반란 비호한 일부 장성들의 세력은 신군부로 불리게 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월 초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하여, 신군부 방해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5·17 쿠데타을 일으켰다. 신군부는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불법 연행하고, 국회에 군병력을 주둔하여 임시국회를 무산시키는 등 반대 세력을 탄압하였다.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하여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하였다.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하나회원들은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특전사령관과 같은 군내 요직 뿐만 아니라 전역후에도 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해체 과정

1993년 초 육사 31기생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非)하나회’로 양분되어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사태는 양측이 한 선술집에서 맥주병이 깨지고 바닥에 뒹굴며 난투극까지 치르는 소동을 벌인 뒤에야 다소 진정되었으나, 이미 동기생들 간의 앙금은 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93년 4월 2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익명의 군인에 의해 '하나회' 명단이 살포되었다.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진행하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책임과 12.12 군사정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등 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지속 논란

하나회는 사실상 육사36기 부터 종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일각에서는 현 소장, 준장급 장성들 가운데 하나회 멤버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예비역 단체도 잠식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군부라는 인식이 없지만 내부적으로 알력이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다. 때문에 대령에서 준장으로의 진급심사에서 총 공석 55자리 중 육사출신이 무려 40석이나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진급총원의 78%에 달한다. 이는 비육사 출신 공석을 모두 합친 것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숫자이다.

군내 유사한 사조직으로 청죽회,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가 있었으나 문민정부의 군내 사조직금지조치 이후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지만 내부적인 알력이 아직 남아 있으며 특히 현역에서 예비군의 세력다툼이 심각하다.



주요 회원 명단


후원자

윤필용(육사 8기, 소장 전역): 사단장, 수경사령관, 도로공사장, 담배인삼공사장

차규헌(육사 8기, 대장 전역): 수경사령관, 수도군단장, 2군 사령관, 교통부 장관

유학성(정훈 1기, 대장 전역): 군수차관보, 3군 사령관, 중앙정보부장, 국회의원

황영시(육사 10기, 대장 전역): 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감사원장


육사 11기

전두환(대장 전역):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대통령

노태우(대장 전역): 9사단장,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대통령

정호용(대장 전역): 50사단장, 특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김복동(중장 전역)

권익현(대령 전역): 26사단 76연대장, 삼성정밀 상무, 국회의원, 민정당 사무총장

손영길

백운택

최성택

안교덕

노정기

박갑룡

남중수

김홍진


육사 12기

박세직(소장 전역): 3사단장, 체육부 장관, 안기부장, 서울시장, 국회의원,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박준병(대장 전역): 20사단장, 보안사령관, 국회의원

박희도(대장 전역): 1공수여단장, 특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토지개발공사장

장기오(중장 전역): 5공수여단장, 총무처장관

김단(중장 전역): 수경사 30경비단장, 국회의원

손성환(소장 전역): 보안사 비서실장

김인석(준장 전역): 보안사 인사처장, 청와대 사정 비서관, 국회의원

안필준

정동철

황인수

이광근


육사 13기

최세창(대장 전역): 3공수여단장, 수경사령관, 합동참모의장

정동호(중장 전역): 청와대 경호실장, 도로공사 사장, 국회의원

오한구

신재기

윤태균

이우재(준장 전역): 1군단 통신참모, 국보위 상임위원, 국회의원

황진기

조명기: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메트로) 감사

우경윤

최문규

권영휘

박종남

정진태


육사 14기

이종구

안무혁

이춘구

배명국

정도영

박정기

장기하

신우식

장홍열

이경종

신쌍호

문영일

최종국

김충욱


육사 15기

이진삼(대장 전역)

민병돈

고명승(대장 전역): 경호실 작전담당관,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김상구

이대희

나중배

권병식

강지화

이한종

이상수

박태진

김중영


육사 16기

장세동(중장 전역): 수경사 30경비단장, 청와대 경호실장, 안기부장

신말업

정순덕

최평욱

송응섭

김정룡

정만길

이필섭

양현두

최원규

이지윤

김충식


육사 17기

허화평(준장 전역): 보안사 비서실장, 청와대 정무 비서관, 국회의원

허삼수(준장 전역): 보안사 인사처장, 청와대 사정 비서관, 국회의원

안현태: 대통령 경호실장

김진영(대장 전역): 수경사 33경비단장, 수경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이현우(중장 전역): 정보사령관, 청와대 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 부장

류근하, 이문석, 김근준, 임인조, 김태섭, 이병태, 이해룡, 강명오, 박장호


육사 18기

이학봉(준장 전역): 보안사 대공처장, 청와대 민정 비서관, 국회의원

구창회, 정태화, 성환옥, 조남풍, 김정헌, 김재창, 이시용, 배대웅, 심준석, 이승남


육사 19기

서완수, 김진선, 노석호, 최석립, 장석규, 김상준, 최윤식, 김택수, 김학주, 최준식, 이택형, 김정환, 최부웅, 최윤수


육사 20기

허청일, 안병호, 김길부(중장 전역), 김무웅, 김종배, 이현부, 함덕선, 장호경, 안광열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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