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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중항쟁(5·18 민주화운동 [─民主化運動])(1980.5.18 ~ 5.27)

by 섹시맘1004 201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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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중항쟁(5·18 민주화운동 [─民主化運動])(1980.5.18 ~ 5.27)


요약 : 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그리고 김대중 석방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내용 :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10.26) 김재규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대통령 대행체제가 진행이 되었다. 이런한 틈을 탄 신군부세력인 전두환, 노태우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12.12사태 이다.

신구부세력은 무력으로 군부 및 정치권을 장악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언론을 통제하는 등 군사통치 시대로 다시 돌아갈려고 할때 유신체제에 이어 민주헌정이 정지되고 민주정치 지도자들이

투옥되는 등 군사독재가 재발하자 국민들은 전국적으로 저항 운동을 지속, 확산해 나갔다.

1980년 5월 15일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으며, 신군부는 이것을 빌미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국무회에서 비상계엄령을 전국 확대를 의결하였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을 토로한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 구타를 당한 학생들이 속출하자, 학생들은 계엄철폐, 휴교령철폐를 외치며 광주의 중심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은 학생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반 시민들도 구타하고 체포하였고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하였다.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여 금남로로 모여들었으며 계엄군과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계엄군과 시민 간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는 점점 격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이 사망하였으며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게 된다.



1980년 5월 21일 시위대 대표가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도청 앞에서 도지사(道知事)와 협상을 벌였으나 계엄군이 오후 12시까지 퇴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렬되었다. 이후 이어진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발포로 인해 사상자 및 부상자들이 속출하였으며, 이 집단발포 이후 시위대는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나주, 화순 등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시작하였다. 시위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결국 무력항쟁으로 변하였으며,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계속해서 계엄군을 압박해 간 결과,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시내를 장악하였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1980년 5월 23일에 구성되었으며,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종용하여 무장해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이 수습위원회의 요구조건은 받아들이지 않고 시위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수습위원회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 대립하게 되었다. 온건파는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강경파는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립의 결과 투쟁파인 강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구성된 새로운 지도부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시민군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 진압군이 시내로 진입하여 도청과 시내를 탈환함으로써 결국 시위는 진압되었다. 


시위 기간 동안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외부에 즉각 알려지지 않았으나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 소식들이 조금씩 전해졌다. 처음에는 유언비어(流言蜚語)처럼 전해지면서, 북한 무장 간첩이 침투하여 저지른 만행이라고 소문나기도 했으나 3일째 되는 날부터 언론에 보도되어 알려졌다. 


진행과정

10일 간의 시민항쟁 주요 사건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5월 17일(토) : 비상계엄 전국확대. 학생운동 지도부 검속. 광주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5월 18일(일) : 전남대생 50여 명 등교 저지. 학생들의 '계엄 해제', '휴교령 철폐' 시위. 공수부대원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학생들 금남로로 이동 시작. 

  

5월 19일(월) : 11여단 병력 증파.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파출소 방화. 공수부대 원들과 투석전 전개.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시위 진압 완화 건의.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학생 김영찬군이 계엄군 총에 부상. 

  

5월 20일(화) : 고등학교 휴교조치. 가톨릭센터 앞 남녀 30여 명이 속옷채로 구타당함. 공수 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금남로에서 200여 대의 택시 차량시위. 시위대 버스에 경찰 4명 사망. 광주MBC건물 방화.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수) : 시외전화 두절. 시체 2구 싣고 금남로에 등장. 광주KBS건물 방화. 시위대 20사단 병력과 충돌. 공수부대원 전진 배치. 광주세무서 전소. 대형헬기 도청 도착. 시위대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공수부대 사격 시작. 청년들 공수부대 집중사격으로 계속 쓰러짐. 헬기에서 도지사 시위해산 종용 방송. 시민들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시민들 탄약고에서 TNT  입수. 공수부대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 외지에서 온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5월 22일(목)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출혈자를 위해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도청 옥상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수습대책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 수습안 전달.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박충훈(朴忠勳) 신임국무총리 '광주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금)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시민 5만여 명 도청광장 집회.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 시내전역에 살포.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토) : 공수부대원,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일) : 김수환 (金壽煥) 추기경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 만장일치 채택.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5월 26일(월) : 계엄군,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 귀가시킴. 시내전화 일체 두절. 

  

5월 27일(화)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가두방송. 금남로에서 시가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 시민군에 무차별 사격. 계엄군, 도청과 시내전역 장악, 진압작전 종료.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시내전화 통화 재개. 


사후 처리

5·18 광주 학생-시민운동에서의 희생은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그 희생은 6·25 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 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 책임자 처리 등 사후처리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이어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5·18 진상 규명, 학살책임자 규명, 배후세력 규명 요구 -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미국 지목, 미문화원 방화 사건 - 6월항쟁 폭발(1987) - 6·29 민주화선언(1987)(군사독재 국민에 굴복) - 제6공화국 탄생(대통령 직선제) -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구성(1988). 광주청문회 실시. 광주민중항쟁을 '5·18 민주화운동'으로 규정. 책임자 처벌 요구 -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1995).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 -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1997) - 역사 교과서에 정식 명칭 사용 


이상의 과정을 거쳐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5·18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5·18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에 따라 1997년부터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용] 네이버지식백과 : 5·18 민주화운동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64921&mobile&categoryId=2000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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